사진=챗GPT 생성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SMR(소형모듈원자로)이 차세대 무탄소 전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과거 SMR 논의가 기술개발 가능성과 시장 전망에 머물렀다면 최근에는 초도호기 건설, 인허가, 부지 확보, 제조 국산화, 사업모델까지 구체화되는 단계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정부와 원전 업계는 2028년 표준설계 인가와 2030년대 글로벌 시장 진입을 목표로 i-SMR(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기술 검증과 공급망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만 SMR이 실제 전력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안전성뿐 아니라 경제성, 반복 건설 경험, 제조 공정 혁신, 지역 수용성까지 함께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산업교육연구소는 'SMR/i-SMR 시장 선점을 위한 최신 분석과 기술개발 및 대응전략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서는 SMR 시장이 정책 지원과 민간 전력 수요를 동시에 등에 업고 확대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장혜윤 삼일회계법인 파트너는 "SMR은 이제 어느 부지에 초도호기를 언제 어떻게 지을 것인지가 핵심 관심사로 옮겨가고 있다"며 “부지 준비와 인허가, 연료 조달 논의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SMR 초도호기 경쟁 본격화
글로벌 SMR 시장은 이미 '초도호기 경쟁'으로 들어섰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주요국은 연구개발 지원을 넘어 실증, 인허가, 건설비 지원, 연료 공급망 확보까지 정책 패키지를 가동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빅테크 기업의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와 맞물려 SMR 실증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해외 진출 유망 지역으로는 동유럽, 북유럽, 동남아가 거론됐다. 동유럽은 석탄발전 비중이 높고 에너지 안보 수요가 큰 지역이다. 폴란드 등은 기존 석탄발전소를 단계적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SMR을 대체 전원으로 검토하고 있다. 기존 석탄발전소 부지를 활용하면 송배전망, 냉각수, 발전소 운영 인프라를 재사용할 수 있어 신규 부지 개발보다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북유럽은 데이터센터와 SMR이 결합할 수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낮은 기온으로 냉각에 유리하고 글로벌 IT 기업들이 무탄소 전력 사용을 요구하면서 대규모 청정 전원 확보가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 파트너는 "북유럽은 자연 냉각 특성 때문에 데이터센터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며 "무탄소 에너지이면서 토지 사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규모 전력원으로 SMR이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남아는 제조업 이전과 전력 부족 문제가 맞물린 시장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글로벌 제조시설 투자가 늘고 있지만 전력망 안정성과 청정 전력 확보가 투자 유치의 병목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베트남 등 일부 국가는 당장은 대형 원전 도입을 우선 검토하고, SMR은 중장기 과제로 접근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i-SMR 설계 특성. 사진=혁신형소형모듈원자로기술개발사업단
표준설계인가 들어간 i-SMR…2028년 기술 검증 목표
임상규 i-SMR기술개발사업단 인허가총괄실장은 국내 i-SMR 기술개발과 인허가 현황을 발표했다. i-SMR 개발 사업의 목표는 2030년대 SMR 상용화 시점에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임 실장은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보된 혁신 핵심 기술을 개발하고, 2028년 이후 시장 경쟁력이 있는 표준설계와 기술 검증을 완료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i-SMR 기술개발사업은 2023년부터 2028년까지 6년간 진행되는 국가 연구개발 사업이다. 총 사업 규모는 약 4000억원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부, 민간이 함께 참여한다.
사업은 크게 표준설계, 혁신 기술 개발, 제조 기술 개발 등 3개 내역 사업과 21개 세부 과제로 구성돼 있다. 앞서 한국수력원자력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약 500억원 규모로 개념·기본 설계를 수행했으며 해상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쳐 2023년부터 진행 중이다.
중요한 진전은 인허가다. 임 실장에 따르면 i-SMR 사업단은 올해 2월 27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표준설계인가를 신청했다. 이에 따라 i-SMR은 본격적인 인허가 심사 단계에 들어갔다.
임 실장은 "i-SMR은 기존 대형 원전과 다른 설계 특성과 혁신 기술을 반영하고 있어 기존 규제 체계와 다른 면이 많다"며 "약 2년 동안 사전설계검토 프로그램을 통해 현행 규제 요건과 i-SMR 설계 간 규제 격차를 식별했다"고 설명했다.
규제 대응도 핵심 과제로 꼽힌다. i-SMR은 비안전 전력계통, 무붕산 운전, 철제 격납용기, 피동안전계통 등 기존 대형 원전과 다른 설계를 적용한다.
원안위는 지난해 10월 '기술 기준 등의 대체 적용 등의 인정에 관한 규정'을 제정, 올해 1월에는 시설 부지 위치 제한 관련 기술 기준도 개정했다. 사업단은 원자력 시설 기술 기준 규칙 8건과 원안위 고시 4건 등 총 12건의 규제 격차를 식별해 대체 적용을 신청한 상태다.
i-SMR 기반 스마트넷제로시티(SSNC) 관제센터 전경. 사진=한국수력원자력
피동안전·모듈화가 핵심
i-SMR의 기본 설계는 일체형 가압경수로다. 한국이 대형 원전에서 축적한 가압경수로 운전·건설 경험을 활용할 수 있고 기존 규제 체계와도 상대적으로 가까운 기술이라는 점이 반영됐다. 출력은 모듈당 170MW(메가와트)급으로 설정됐다. 기존 경쟁 노형보다 출력을 높여 경제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하나의 발전소는 170MW급 원자로 4개 모듈로 구성돼 총 680MW급 전력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설계수명은 기존 대형 원전보다 긴 80년으로 설정됐다.
안전성은 i-SMR 설계의 핵심이다. 임 실장은 "i-SMR의 목표 중 하나는 근본적으로 대형 원전과 다른 수준의 안전성을 확보해 수요지 인근 배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업단은 기존 대형 원전 대비 노심 손상 빈도를 대폭 낮추고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운전원이 별도로 조치하지 않아도 안전 정지가 가능하도록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i-SMR은 외부 전원과 펌프 의존도를 낮춘 피동안전계통을 채택한다. 기존 대형 원전은 사고 시 안전주입펌프, 잔열제거펌프, 보조급수펌프 등 전원이 필요한 설비가 작동해야 하지만 i-SMR은 자연 순환, 압력 차, 중력 등 물리적 현상을 활용해 냉각과 잔열 제거가 이뤄지도록 설계됐다.
건설성도 중요한 차별화 요소다. i-SMR은 주요 기기를 공장에서 제작한 뒤 현장에서 설치하는 모듈화 방식을 확대해 건설 기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임 실장은 "4개 모듈을 약 42개월 이내에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며 "이를 위해 주요 기기를 일체형으로 설계하고 공장 제작 비중을 높여 현장 시공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개막한 '2026 부산국제원자력산업전'에서 관람객들이 혁신형 소형모듈원전(I-SMR)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석탄발전소에서 데이터센터까지 넓어지는 SMR 수요처
국내 SMR 도입은 단기적으로 노후 석탄화력 전환에서 먼저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Coal-to-SMR' 모델이다. 기존 석탄발전소 부지는 송배전망, 냉각수, 발전소 운영 인프라를 이미 갖추고 있어 신규 부지보다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장혜윤 파트너는 "노후 석탄화력 전환은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이 검토되는 접근"이라며 "국내에서도 폐지되는 석탄발전소를 주목해 사업 기획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중기적으로는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가 SMR의 주요 수요처로 꼽힌다.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은 대규모 산업단지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다. 장 파트너는 "국내의 경우 데이터센터 입지는 여전히 도시와 수도권 인근 수요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며 "청정 전력 확보를 위해 SMR 활용 가능성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철강과 석유화학 등 산업 공정 전기화와 SMR의 결합은 장기 과제로 분류됐다. 국내 산업계도 탄소 감축을 위해 전기화와 수소 활용을 검토하고 있지만 관련 공정 기술이 아직 개발·실증 단계에 있어 SMR 적용은 2040년대 이후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장 파트너는 "철강이나 석유화학 부문은 국내에서 전기 공정 전환 기술이 아직 개발 단계"라며 "중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열릴 수 있는 시장"이라고 말했다.
SMR 경제성 열쇠는 '제조 혁신'
SMR 상용화를 뒷받침할 제조 기술과 원전 연구개발 과제도 다뤄졌다. 김종성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미래원자력 PD는 원자력 선행 연구 분야의 핵심 과제로 ▲i-SMR 상용화 관리 ▲SMR 경제성 향상 ▲대형 원전 활용 확대 ▲원전 수출 경쟁력 강화 ▲4세대 원전 가시화 등을 제시했다. 특히 신규 사업으로 SMR 혁신 제조 국산화 기술 개발 사업과 i-SMR 상용화 기술 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PD는 "SMR은 대형 원전에 비해 경제성이 나오기 어렵다"며 제조 혁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형 원전보다 출력 규모가 작은 SMR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반복 건설과 함께 제작 공정 단축, 핵심 설비 국산화, 현장 시공 최소화가 필수라는 의미다.
핵심 제조 기술로는 전자빔용접(EBW), 3D 프린팅 계열의 와이어 아크 적층 제조, 주요 소재·부품 국산화 등이 거론됐다. 김 PD는 기존 현장 수요 대응 기술 개발 사업이 장비를 직접 개발하기보다 공정 개발과 소규모 실증에 가까웠다면, SMR 혁신 제조 국산화 사업은 실제 장비와 제조 역량 확보에 초점을 둔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축은 '글로벌 SMR 파운드리 허브' 구상이다. SMR 설계·활용 기술 확보와 함께 혁신 제조 공정·소재·설비 개발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는 한국이 원전 설계와 시공 경험을 넘어 SMR 주요 기기와 모듈을 제작·공급하는 제조 허브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수원이 '한-인도 i-SMR 워크숍'을 개최했다. 사진=한국수력원자력
사업성·탄소가치·지역 수용성 함께 봐야
SMR이 실제 시장을 열기 위해서는 기술 개발만으로는 부족하다. 장 파트너는 기업 대응 전략으로 기술 가치평가, 재무·파이낸싱 전략,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 탄소 회피 가치 반영, 지역사회 파트너십을 제시했다. SMR은 초기 투자 부담과 인허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일반 발전 프로젝트와 다른 방식의 사업성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업모델도 다양해질 수 있다. 초기에는 기술 라이선싱, EPC(설계·조달·시공), 핵심 기자재 공급 모델이 중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후 시장이 성숙하면 SMR을 직접 소유·운영하는 BOO 모델, 전 생애주기를 관리하는 EPC+운영·정비 모델, 수소·열 공급·집단에너지와 결합한 융복합 모델로 확장될 수 있다. 전력 판매 방식도 한전 대상 판매뿐 아니라 전력구매계약(PPA), 분산에너지, 자가소비형 모델 등으로 넓어질 수 있다.
SMR 시장의 승부처는 실제 구현 능력이다. 한국형 i-SMR이 2028년 표준설계인가를 확보하고 2030년대 글로벌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인허가 대응, 초도호기 부지 선정, 제조 국산화, 민간 참여 구조를 동시에 구체화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제언이다.
AI와 반도체가 전력 수요의 새로운 축으로 떠오른 가운데, SMR은 차세대 원전 수출 상품이자 한국 전력 인프라 경쟁력의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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