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 오일쇼크, 조정자로 나섰던 미국
조정자 대신 동맹에 위기 떠넘기는 역할
패권국 '결위' 시대, 새 질서 모색할 필요
편집자주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흐릿하거나 긴밀히 맞물려 돌아가는 이 시대에, '김양희의 경제안보'는 국내외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문제들을 경제안보라는 독법으로 읽어내 그로부터 우리가 취해야 할 실천적 함의를 끄집어내고자 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3월 7일 이란 테헤란의 석유 저장 시설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다. AP 뉴시스
1973년 10월,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금수를 선언했을 때 세계는 에너지의 무기화 위력을 처음 절감했다. 하루 약 400만~500만 배럴, 당시 세계 공급의 5~7%가 사라지자 유가는 단숨에 네 배 가까이 뛰었고 주요국의 심각한 경기침체를 부채질했다. 당시 위기 요인 중 하나는 미국의 대규모 이스라엘 군사 지원이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휘청이던 닉슨 행정부조차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키신저의 셔틀 외교는 중동의 긴장 완화에 기여했고, 미국은 국제에너지기구(IEA) 창설과 전략비축유 체제 구축을 주도하며 자신이 촉발한 충격의 비용을 서방 내부 제도 개편에 지불했다. 위기의 한 축인 동시에 조정자이자 서방 내부 질서의 건축자, 그것이 당시 패권국 미국의 모습이었다.
1979년 2차 석유 위기 때도 미국 역할은 비슷했다. 장기간 지원해 온 이란 팔레비 왕정의 붕괴가 공급 위기를 키웠지만, 수습을 이끈 것도 미국이었다. 폴 볼커 연준 의장은 기준금리를 20% 가까이 높이는 고강도 긴축으로 인플레이션에 맞섰다. 남미 채무위기 등의 부작용도 뒤따랐지만, 당시에는 미국의 대처 능력을 신뢰할 만했다. 두 차례 오일 쇼크에서 미국은 위기의 한 축이면서도 ‘조정자’ 역할을 자임했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에 이은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는 얼핏 과거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해협을 통과하는 하루 1,700만~2,000만 배럴, 세계 해상수송의 15%~20%에 해당하는 원유와 석유제품의 수송이 일대 차질을 빚었다. 그러나 위기의 구도와 파급 경로는 과거와 궤를 달리한다. 당시 석유와 가스가 주로 연료로 쓰였다면, 오늘날에는 전자·자동차·포장재·건축자재·비료·반도체·화장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산업의 기반 소재가 됐다. 중동발 위기는 곧 공급망 전반에 연쇄 교란을 야기했다. 중동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는 직격탄을 맞았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미국의 빈자리다. 과거 위기 촉발에 관여하면서도 조정자로서 공공재 제공 역할을 마다하지 않던 패권국의 면모는 기대 난망이다. 오히려 미국은 자기 탓에 피해를 입은 동맹과 우방에 책임과 비용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혼돈과 무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조정자의 부재야말로, 위기의 장기화가 우려되는 최대 요인이다.
사실 조정자 공백 사태가 처음은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5년 시작된 관세 전쟁, 그리고 이번 에너지 위기까지, 각기 원인과 경로는 달라도 공통점은 하나다. 미국이 혼돈을 막아서는 방파제가 아니라, 오히려 충격의 진원지로 전락한 서사의 반복이라는 점이다.
패권국의 조정 능력과 의지가 무너지는, ‘결위(缺位)의 시대’는 얼마나 길어질까. 미국은 다시 위기 수습의 선두에 서게 될까, 아니면 위기 장기화를 부추길 뿐일까. 현재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과 같은 중견국의 선택지는 달라져야 한다. 에너지 내재화율 제고와 수입원 다변화, 이를 위한 중견국 경제안보 네트워크 구축 등이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한국은 ‘조정자 공백’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 전환기에 수동적 경제안보에 머무르기보다, 능동적으로 새로운 질서 설계에 동참해야 한다. 끝 모를 에너지 안보 위기 초입에서 한국 경제안보전략이 응답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금융통상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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