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KISIA)가 메모리 반도체 가격 상승에 대응해 납품가 연동을 추진했으나, 결국 철회한 것으로 확인됐다. 외부 변수에 따라 계약금을 조정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있음에도 실제 활용은 극히 드물어, 유명무실한 제도라는 지적도 나온다.
31일 조달청 관계자는 "KISIA로부터 가격 조정 문의는 있었지만 실제 신청 접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현행 국가계약법 시행령 제64조(물가변동으로 인한 계약금액의 조정)는 원자재값 급등으로 계약 이행이 어렵다고 인정되는 경우 계약금 조정을 허용하고 있다.
◇ "서류 준비하다..." KISIA, 집단 대응 철회
당초 KISIA는 법적 조항을 근거로 회원사들을 대변해 가격 조정을 추진해 왔으나, 최근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고 본지에 밝혔다. 원가계산보고서 같은 증빙 서류를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차질을 빚은 영향이다.
KISIA 관계자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기업 원가 자료를 전문기관에 제출해야 하는데, 대외비 성격이 강한 내부 핵심 자료를 일괄 제공하는 것에 대해 회원사들이 느끼는 부담이 컸다"며 "행정 처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고려한 결과, 개별 기업이 각자의 상황에 맞춰 가격 조정을 신청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일괄 가격 조정을 꾀하던 KISIA는 재정경제부를 상대로 예산 증액을 요청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 10배 뛴 D램값, 보안 장비 마진 압박
KISIA가 이러한 가격 조정을 고심했던 배경에는 유례없는 '칩인플레이션(반도체+인플레이션)' 위기가 있다.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올해 2월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8Gb 가격은 13달러다. 지난해 2월(1.35달러)의 10배 수준이다. 낸드도 128Gb MLC 기준 12.67달러로, 1년 전에 비해 5배 올랐다.
부품값 급등은 스마트폰, 랩톱뿐만 아니라 스위치, VPN 게이트웨이 등 네트워크 보안 장비 가격도 끌어올렸다. 보안 장비는 고가형일수록 실시간 패킷 분석과 세션 관리를 위해 메모리가 다량 탑재된다. 이에 하드웨어에 자체 소프트웨어를 적용하는 업체일수록 마진 압박이 클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는 밝혔다. 국내 기업 중에는 안랩, 파이오링크, 시큐아이 등이 대표적인 회사다.
국내 정보보호 업체 직원 A씨는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D램 가격 상승과 수급 불안정은 현장에서 매우 강하게 체감하는 부분"이라며 "부품 공급 물량이 제한되거나 기존 계획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장비 공급사 직원 B씨 역시 "발주 이후에도 출고 시점 가격이 적용되면서 기존 14일 단위였던 가격 조정 주기는 최근 3일 단위로 짧아졌다"고 호소했다.
정부의 정보보안 관련 예산. (사진=정보보호산업진흥포털 갈무리)
정보보호산업진흥포털 통계에 따르면 올해 정부의 정보보안 예산은 7660억원이다. 전년(7948억원) 대비 4% 감소했다. 더욱이 하드웨어 (HW) 구매 예산은 2025년과 2026년 모두 1170억원으로 책정됐다. 메모리 가격이 10배 이상 오른 상황에서 현행 예산 규모로는 예년 수준의 장비 도입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 업계 시각이다.
◇ 가격 조정 요청 전무...적극적 홍보 필요
한편 조달청에 따르면, 올해 혁신조달기획관 내 첨단융복합제품구매과에 메모리 가격 상승을 이유로 가격 조정을 요청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구제 제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설령 알더라도 까다로운 신청 조건 탓에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승주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조달 분야, 특히 가격 조정은 추후 감사 이슈와 맞물려 서류와 절차가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지금은 (메모리값 폭등이라는) 특수 상황인 만큼 정부도 적극 홍보하고 필요하다면 신청방법에 대해 별도 온라인, 오프라인 설명회를 가지면 좋을 듯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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