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5월 18일 백악관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 미국을 공개 비판한 박정희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대미(對美)외교는 한미동맹체제의 정착과 강화라는 정책목표 아래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이 한국전쟁을 자국의 경제적 도약과 번영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고 인식한 박정희는 베트남전쟁을 ‘조국 근대화’를 통한 산업화의 달성과 한국군의 현대화, 그리고 주한미군의 철수 저지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간주했다. 한미 양국은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 야욕에 대한 위협인식을 철저하게 공유했기 때문에 1960년대의 한미동맹은 동맹의 ‘재확인’ 과정을 거친 후, 동맹의 강화를 통한 ‘밀월’의 시기를 유지했다.
1968년 1월 냉전의 전초기지인 한반도에서 2개의 사건이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1월 21일 북한이 무장 특수부대를 서울에 침투시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고, 이틀 후인 23일, 북한은 원산(元山) 앞바다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고 있었던 미 해군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 방안을 둘러싸고 한미 양국은 심각한 이견대립을 보였고, 그로 인해 한미동맹은 ‘밀월’의 관계에서 ‘긴장’의 관계로 돌입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북한의 도전에 즉각적인 군사적 보복을 주장했지만, 베트남전쟁의 장기화로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던 존슨 행정부는 한반도에 ‘제2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를 반드시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한 한국 정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존슨은 비밀리에 북한과의 직접협상을 통한 외교적 방법으로 ‘푸에블로호’ 사건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박정희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2월 1일 한국 정부는 미국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 군현대화 지원 얻어낸 박정희 외교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조속한 장비현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전문을 포터(William J. Porter)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전달했다. 며칠 후 박정희는 존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어떠한 침략 행위도 반드시 그에 따른 응징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영원히, 그리고 전적으로 미국에게만 의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독자적인 자주국방체제의 조속한 확립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요구한 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향후 주한미군의 추가적인 철군이 있는 경우에 자신의 동의를 얻은 후에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군 현대화가 완료된 이후에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미국 측과의 대화에서 1969년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닉슨 대통령이 안보공약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미국의 신뢰성을 문제 삼았다. 특히 박정희는 주한미군이 철수한다고 해도, 한국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진 후에 철수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1960-70년대 박정희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는 국가안보를 확보하고, 동시에 경제적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의 대미(對美)외교정책의 핵심도 국가적 과제의 조속한 실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1960년대 한미 양국의 최대 현안이 베트남전쟁이었다면, 1970년대의 최대 현안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였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국은 2만명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후 닉슨 행정부가 약속한 한국군의 현대화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자, ‘동맹국’ 미국에 대한 신뢰가 약화된 박정희의 안보 불안감은 고조되었고, 당연히 그의 ‘자주국방’ 의지도 더욱 굳어만 갔다. 외부위협에 대한 양국의 커다란 인식의 차이는 한미동맹의 긴장과 갈등을 초래했다.
1972년 미국과 중국이 화해를 위한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방문과 1973년 파리평화협정의 체결로 인한 베트남전쟁의 종식과 베트남의 공산화가 궁극적으로 불가피할 것이라는 박정희의 판단은, 자주국방을 위한 확실한 안전장치인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포드 행정부는 박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노력을 단념시키기 위해 엄청난 압력과 협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박정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핵무기개발과 미국의 강압적인 저지로 인해 한미동맹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게 되었다.
위의 내용은 국가의 존망을 걱정해야 하는 냉전시대를 지도한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 미국과 반목과 협력을 거듭하며 대한민국을 발전시킨 과정에서 한번 쯤 들어봤을 한미동맹에 관한 주요한 내용들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렇게 자국의 이익만을 결국에는 관철시키는 미국과의 동맹이 도대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민족주의로 점철된 일부 오피니언 리더들은 “민족”이라는 틀 안에 한국의 대미 외교는 역사적으로 대등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작으로 잔뜩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국력의 차이는 인정해야만 한다. 역대 모든 패권국들이 그러했고, 현실적 이해관계와 이상주의에서 사이에서 항상 그 현실을 직시하는 국가가 패권을 잡았다. 당연히 국가의 크기와 같은 태생적 한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적 위치를 보면 그들을 역사적으로 패권국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음의 역사적 사례는 우리가 어떻게 국제관계를 인식해야 하는 현실주의적 시각이 존재하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979년 6월 29일 한국을 방문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박정희 대통령.
◇ 경제규모의 팽창은 동맹이다
1855년 9월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러시아의 세바스트로폴 항구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압박해 흑해를 통한 해양진출을 노리던 러시아는 영불 연합에게 전례 없는 참패를 당하고 본래의 전략을 접어야 했다. 이 전쟁이 바로 “크림전쟁”이다. 몇 년 후 영국과 프랑스는 2차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마저 함락한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막강한 두 제국이 강소동맹에게 무릎 꿇는 순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영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다.
인구수, 영토의 크기, 전반적인 지적수준(?)을 볼 때 영국은 결코 패권국이 될 만한 요소가 없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 그들 편이었고, 서유럽 끝의 섬나라는 오늘도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며 국제여론을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다. 이들에게 어떤 재능이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국제정세를 살피며 시류에 편승하는 것이다. 영국은 10세기 이래로 고도의 개방경제였다.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와 독일이 창조해 낸 과학의 결과물을 후발주자 영국은 “재산권의 확립”을 통해 시장화 시켰고, 멋지게 흡수했다.
따지고 보면 영국은 기존의 패권국 몽골, 오스만 투르크, 만주족의 청나라처럼 그리 전투적인 국가도 아니다. 단독으로 직접 맞붙어 승리한 전쟁도 별로 없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열린 사고는 동맹국들과 연합 및 대립(Balance of Power)의 반복을 통해 무굴제국을 통치했고, 무적함대 스페인, 나폴레옹을 제압한 러시아, 마침내 청나라마저 굴복시킨 후, 20세기 최대 사건인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도 승리했다. 그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결정적인 이권 앞에서는 과감한 희생을 감수하는지 알 수 있다.
◇경제와 전쟁은 “무협지의 결투”가 아니다
위의 사례처럼 동맹은 국가의 운명을 바꾸고, 새로운 비전을 창출해내는 마법을 발휘한다.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한 게 영국이라는 국가다. 본인들이 가진 국력의 2배 이상 시너지를 발휘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 쯤 고민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봤을 “한미동맹”이라는 문제를 위의 필터링으로 바라보자.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이 귀중한 관계에 대한 시각은 2가지인 것 같다. 당장 없어져야 한다는 세력이 존재하며, 또 다른 시각은 필요는 하지만 왠지 찜찜한 무엇으로 해석한다. 다른 하나를 더하자면 한미관계를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던지 아니면 관심이 없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해양세력 영국의 정체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미국이라는 21세기 하이퍼파워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합목적(合目的)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좌우정치 이념을 떠나 한국인들이 버려야 할 한 가지가 기존의 강국들처럼 실무적인 무언가를 위해 피를 흘려본 적 없는 문명이 가진 박약(薄弱)함이다. 그러다보니 미국과의 관계를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벗어난 “상하관계”로 해석하는 것이다. 공명정대(公明正大), 정정당당(正正堂堂)과 같은 주자학에 찌든 선비들의 이론은 농업경제에 기반을 둔 엘리트계층(선비)의 사회지배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구조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속에서 경제적 이권, 개인의 부(富), 전쟁 수행능력과 같은 실리적 사고는 존중받지 못해왔다.
한미관계는 상하관계가 결코 아니다. 냉전시대 두 축이었던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적인 선택이었으며, 경제모델을 두고 선택을 반강제적으로 강요받았던 시기의 올바른 선택이자 외교적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라는 좁은 틀로써만 한미관계를 바라본다면, 분명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한미동맹은 필요하다. 100명이 전사하고 승리할 전쟁터에서 10명이 전사하고 승리하는 것은 분명 실리적인 것이다.
한미동맹의 역할은 희생을 최소화하고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요소를 방어하는 가장 현실적인 국가 관계다. 전쟁과 외교는 무협지 주인공들의 세계관인 공명정대(公明正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가장 현실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합목적(合目的) 세계관이 중요하며, 한미관계는 이것을 증명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동맹은 국가 운명 바꾸고 새비전 창출
냉전시대 현실적 선택이자 외교적 업적
패권국과 관계 속 실리적 이득 얻어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강국 건설
◇한미동맹, 대한민국이라는 강국을 만들다
20세기 초반 세계10대 강대국과 오늘날 세계10대 강대국들은 거의 똑 같다. 여기에 딱 한 나라가 추가되었는데, 그 하나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다. 자신들이 가진 문명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개조해서 성공한 사례가 우리의 근대사이다. 뒤돌아보면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줄곧 국력팽창의 역사였다.
경제규모, 군사력,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과 고유명사로서 “카스트 제도”를 완벽히 붕괴시킨 국가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러한 바탕에는 조국 근대화라는 냉전시대 강력한 경제개발이 원동력이었고 여기서 방위비를 최소화 할 수 있었던 한미동맹이 존재한다.영국과 대한민국은 국토면적과 인구수에서 비슷하다. 필자의 희망사항(?)일지 모르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종합 국력이 영국의 그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도 없을뿐더러 삶의 질에선 오히려 앞서는 부분이 많다.
우리는 건국 이래로 줄곧 서구의 성공 사례를 착실히 흡수했으며, 그들의 목적지향적인 세계관이 탄생시킨 생산적인 지식도 우리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결과는 물리력과 지적능력(High Intelligence)을 모두 갖춘 미국이라는 패권국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그들을 활용했는지를 보여준다. 한미동맹은 그 관계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강대국을 탄생시켰다.
냉전시대 국가지도부들의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디딤돌 역시 한미관계다. 대한민국은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냉전시대의 두 “빅브라더”들과 붙어있다. 과거 영국의 세력균형 전략(Balance of Power)은 개방경제와 함께 딱히 강국도 아닌 그들을 패권국가로 만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과거 영국이 동맹외교를 통해 전략균형을 이루어냈던 지혜가 필요하다.
‘동맹’은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때 성립한다.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따른 ‘동맹’의 결성과 강화는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미국의 봉쇄정책에 따른 베트남전쟁의 ‘미국화’ 과정에서, 한미 양국은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한 위협인식을 철저하게 공유했기 때문에 1960년대의 한미동맹은 동맹의 강화를 통한 ‘밀월’의 시기였다.
한국의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해 박정희는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파병을 결심했고, 미국과의 치열한 협상과정에서 ‘악착같은 군사ㆍ경제외교’를 펼쳤다. 전투병 파병을 계기로 한미동맹은 더욱 강화되었고, 동시에 미국에 대한 한국의 발언권도 높아졌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동맹’의 내용과 효력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항상 가변적이라는 국제정치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으니 때로는 불평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또 때로는 수긍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착실히 진행되었고, 특정 사건 몇 개를 가지고 그 시대를 함부로 폄훼할 수 없는 강력한 성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미동맹의 약화는 주변 강대국(중국, 러시아등) 사이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적 입지가 오히려 좁아지는 ‘안보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는 것이 더 당당하게 주변국과 외교적·경제적 협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미동맹은 한반도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 안보, 첨단 기술, 공급망 협력, 기후 변화 등 글로벌 이슈를 해결하는 확장된 동맹으로 발전해 왔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외교적 지평을 넓히는 핵심 동력으로써 여전히 유효한 가치인 것이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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