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기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총무국장이 8일 194일간의 통신탑 고공농성을 마치고 땅으로 내려와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있다. 사진 제공=공공운수노조
지상 20m 높이 철탑 위 0.25평 남짓한 비좁은 발판 위에서 한여름 폭염과 비바람을 견뎌낸 택시노동자가 마침내 땅을 밟았다. 고영기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총무국장은 지난 3월 29일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지역사무실 앞 통신탑에 올라 194일을 버텼다.
8일 그가 지상으로 내려오자, 현장을 지키던 동료 노동자들과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눈물과 환호로 맞이했다. 폭 52cm 쇠기둥 위는 사람이 눕기는커녕 앉아있기조차 힘든 곳이었다. 혈압약을 늘려도 치솟는 혈압과 이상 신호를 보내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가 쇠기둥을 놓지 않은 이유는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이다.
폐지됐다던 사납금제는 ‘기준금’으로 이름만 바꿨다. 외근 등 노동시간 산정이 어려울 때 노사 합의로 일정 시간만 일한 것으로 치는 ‘간주근로시간제’는 하루 12~13시간의 운전을 서류상 3~4시간으로 쪼갰다. 200만 원 남짓의 월급을 쥐려 과로와 과속에 내몰리는 악순환을 끊어내겠다는 절박함이 그를 반년 동안 버티게 했다. 결국 정부는 ‘실태조사 태스크포스(TF)’를 출범해 간주근로시간제 제외 등 제도 개선의 첫발을 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비로소 194일간의 고공 투쟁을 매듭짓고 정부의 약속을 지켜보기로 했다.
고영기 택시노동자의 고공 농성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노동시민단체가 7월 6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제공=공공운수노조
고 국장의 고공농성이 100일을 맞이했던 7월 6일.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에서는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당시 현장에서는 고 국장의 고백이 전해졌다. 정작 고 국장 본인은 소속 사업장에서 이미 월급제를 적용받아 생활이 안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사납금과 쪼개기 계약에 묶인 대다수 동료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 쇠기둥에 올랐다. 그는 고공에서 “월급제가 시행되어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퇴근하며 안정적인 수입을 얻게 되니, 손님이 돈이 아니라 비로소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정부와 국회의 방치를 규탄하며 제도 개선을 한목소리로 촉구했다. 의료 현장에서 고 국장의 건강 상태를 살펴온 최규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인권위원장은 법인택시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시민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최 위원장은 “일본 택시의 친절과 안전운전 비결은 대기시간까지 노동시간으로 인정하고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는 데 있다”며 “반면 한국 법인택시는 하루 200km 이상을 달리며 사고 사망 규모가 일본의 최대 10배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납금 400만 원을 채우려 12~13시간을 일해야 겨우 200만 원 남짓 쥐는 구조는 시민 안전까지 위협하는 시한폭탄”이라고 호소했다.
노동계와 법조계에서는 간주근로시간제의 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박정훈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디지털 타코미터(DTG)로 초 단위 실시간 노동 통제가 가능하고 매출이 투명하게 드러난다”며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다며 간주근로시간제를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일한 만큼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택시 산업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의 이수열 변호사는 “택시에는 운행기록장치, 미터기, 카드결제, 배차 및 호출 앱, 위치확인시스템(GPS) 기록이 모두 남아 있어 출근 시간부터 승객 탑승, 빈차 이동, 대기 장소까지 명확히 입증할 수 있다”며 “실제 일한 시간을 간주근로시간제로 지우는 것은 법의 공백이 아닌 명백한 정부의 방치”라고 비판했다.
최세호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장은 정부의 역할이 미흡했다고 질타했다. 최 지부장은 “7년을 기다린 주 40시간 이상 임금 보장 법안 시행을 국회가 또다시 2년 유예하고 예외조항까지 두며 개악했다”며 “정부는 근로기준법 시행령을 개정해 택시업종을 간주근로제에서 즉각 제외해야 한다”고 말했다.
택시업종 근로시간 및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위해 출범한 노·사·정 태스크포스(TF)가 8일 서울 중구 직업능력심사평가원에서 첫 회의를 열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고용노동부
결국 정부의 문이 열렸다. 노동부와 국토부는 8일 서울 중구 직업능력심사평가원 회의실에서 택시업종 노동환경 실태조사 TF 첫 회의를 열었다. TF에는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등 노동계,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정부와 전문가들이 마주 앉았다.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전자장비를 통한 근로시간 산정 가능 여부와 종속성 여부, 해외 노동환경 사례 등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공공운수노조와 시민사회지원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택시노동자가 194일 동안 하늘감옥에서 울부짖어야만 제도개선의 첫발을 떼게 된 현실은 분노스럽다”면서도 “일한 만큼 월급 받자는 외침이 만들어낸 값진 승리”라며 TF 출범을 환영했다. 이어 “TF 구성과 실태조사는 시작일 뿐”이라며 “정부는 빠른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간주근로시간제 제외를 위한 시행령과 지침 개정에 즉각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화 테이블 앞에는 노·사 간 팽팽한 쟁점들이 많다. 디지털 운행기록이 있더라도 승객이 타지 않은 빈차 시간을 어떻게 규정할지가 관건이다.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는 대기시간(근로시간)과 개인 휴게시간의 기준 마련은 간단치 않은 과제다. 택시업계의 재정 지불능력 문제도 걸려 있다. 플랫폼 운송사업자와의 경쟁과 승객 감소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법인택시 업계의 현실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을 줄이고 안정적 월급제를 안착시키려면 택시 요금 체계 개편과 정부의 재정 지원 방안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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