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 선생이 김광균의 시 ‘와사등’을 암송하며 자필로 쓰고 있다. 시잡지 ‘유심’ 제공
최불암(앞줄 왼쪽) 배우가 지난 2017년 ‘시로 만난 별들’ 북콘서트에서 주요 참석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최불암 배우가 타계한 지 아흐레가 되는 7일까지 그의 연기 생활과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각계 추모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도 새삼 조명되고 있다. 공식 등단을 한 것은 아니지만, 시문학계와 가까이 지내며 주변 사람들에게 시(詩)와 같은 문자를 통해 깊은 울림을 주는 ‘시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의 지인들은 사적인 부분을 노출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의 ‘문자시(詩)’를 공개함으로써 ‘배우 시인 최불암’의 미학을 기록하길 바라고 있다.
“세월 많이 보낸 노땅은
젊은 기운 보내 준 덕에
내일을 향하고 있습니다.
미안해요, 오래 아파서.
빨리 일어나 생맥부터
쭉 마십시다. 불”
이 문자는 최 배우가 작년 9월 평소 가까이 지냈던 기자에게 보낸 것이다. 최 배우는 문자 마지막을 ‘최불암’, ‘불암’, ‘불’ 등으로 다양하게 적었다. 그는 문학계에서 활동하는 문인이기도 한 기자와 자주 소통하며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코로나 팬더믹 시기엔 이런 내용을 보냈다.
“입이 막히고 만남이 막히고 허나
청량한 가을과 추석은 우릴 찾아주었네요 …
모든 게 혼돈이라 순서를 잃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좋은 날 되십시요. 불암”
MBC 창사 60주년 특집 ‘다큐플렉스-전원일기 2021’을 맡았던 김현기 PD도 최 배우 타계 후 SNS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그가 보낸 문자는 읽는 이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한 편의 시였다. 그의 빼어났던 연기처럼 말이다.”
김 PD는 최 배우로부터 생애를 기록으로 남기는 다큐멘터리를 제안받았다고 밝혔다. 다큐 ‘파하, 최불암입니다’가 나온 배경인데, 회사 내부 사정으로 김 PD는 제작에 참여하지 못했다. 당초 출연할 예정이었던 최 배우도 건강이 악화하는 바람에 직접 나오지 못한 채 다큐가 제작됐다. 김 PD는 최 배우 타계 후 그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선생님은 좋은 어른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인사말을 건네는 분이었다.”
김혜수(가운데) 배우가 지난 2021년 1월14일 방송된 KBS ‘한국인의 밥상’ 10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 최불암 배우에게 안기듯 하며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왼쪽은 그가 어머니처럼 여기는 김민자 배우. 자료 사진.
김혜수(오른쪽) 배우가 최불암 선생 상가에서 슬픔에 빠진 김민자 배우를 부축하고 있다.
최 배우의 ‘문자시’를 방송을 통해 최초로 알린 이는 김혜수 배우였다. 김 배우는 고인의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김민자 배우 등 유족과 함께 슬픔을 함께 했다. 그는 청소년기인 1987년 드라마 ‘사모곡’에서 김민자 배우의 극중 수양딸로 나온 뒤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왔다. 최불암- 김민자 부부를 부모처럼 여기며 친덥게 지내왔다.
최 배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김 배우를 칭찬하곤 했다. 한 세대 아랫 사람이지만 세상 사람들을 위로하면서도 성찰하도록 이끄는 연기자의 역할을 뚜렷이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기·방송 생활 틈틈이 독서를 즐겨 했던 최 배우는 김 배우가 책을 가까이 하는 연기자라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김 배우는 지난 2021년 1월14일 방송된 KBS ‘한국인의 밥상’ 10주년 특집에 출연했다. 그는 ‘한국인의 밥상’을 10년간 진행한 최 배우를 위한 음식을 준비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아껴준 김민자 배우와 함께였다. 그 때 김 배우는 “가끔 선생님 두 분이랑 문자를 나눈다”라며 “(최불암) 선생님의 문자는 한 편의 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 배우의 문자 하나를 소개했다. (김 배우는 사적 인연을 공개석상에서 드러내는 편이 아니지만, 자신의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해 온 어른의 휴머니티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국 나가 있다고 들었는데,
들어왔다가 또 뉴욕으로 향하는군.
열두서너 시간 걸리는 먼 거리를
어찌 다녀오나. 시원한 바람이 이는
서울을 뒤로하고 말이야.
포도주 한잔 하고 무조건 자야 해!
그리움이나 보고픔도 지우면서 몸을
쉬게 해야 해. 뉴욕은 좋아.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 포도가 익는 계절
비행기 안은 꿈의 계절이 되어야 해. 그럼 다녀와 혜수가 꾼 꿈 얘기를
듣자고! 불”
최 배우의 문자는 시적 운치 속에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전통의 예의범절을 중시하면서도 아랫사람에게 윗사람인 척 하지 않았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홍보·후원 활동을 함께 했던 연예인들. 오른쪽부터 최불암, 김경란, 이홍렬 씨.
지난 2013년 소외아동 돕기 공연 포스터. 최불암, 김경란, 이홍렬 씨 등 초록우산 홍보대사들이 함께 했다.
아나운서 출신의 김경란 배우도 최 배우와 가까이 지내며 문자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최 배우의 생전 문자를 공개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다면서도 이렇게 전했다. “길고 긴, 그야말로 시라 여길 문자도 받아보고 긴 세월의 인연을 간직한 글조각들이 몇몇 있지요.”
김 배우는 KBS 아나운서였던 2003년 ‘좋은나라 운동본부’에서 최 배우를 만난 이후로 오랫동안 존경해왔다고 전했다. 두 사람의 연은 그가 2010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홍보대사를 맡으며 더욱 깊어졌다. 최 배우는 1981년부터 초록우산 홍보대사 역할을 했고, 1985년부터 전국후원회장을 맡아 국내외 취약계층 어린이들을 위한 후원 활동을 지속했다.
김 배우가 지난 2015년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는 뜻을 비치자, 최 배우는 크게 격려하며 실제 도전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최 배우가 예술감독을 맡은 연극 ‘시유어겐’이 김 배우의 첫 출연작. 그 이후 초록우산 연말 공연, 청각장애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사랑의달팽이 공연 등에 참여했다. 최 배우는 연극에선 신인이었던 그를 응원하기 위해 이런 문자를 보내줬다.
‘반듯한 몸의 중심
깊은 시선으로 상대와 객석을 잡는 기본적 무대 서기가 걸음 등 어느새 그런 관록이 배었는지 보는 이 모두 함께 4중주로 합창을 했지ㅡ 멋졌어!♡
불’
김 배우는 여러 무대에서 워밍업을 한 후 올해는 ‘갈매기’, ‘기억의 숲’, ‘세상 참 예쁜 오드리’ 등 연극을 내리 하면서 연기 활동을 본격화했다. 지난 9월 10일부터 서울 대학로 지즐소극장에서 시작했던 ‘빈집’은 오는 15일까지 이어진다.
김 배우는 미스터리 스릴러인 ‘빈집’에서 주인공 경희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세상과 단절된 숲속에 사는 소설가 경희는 어느날 낯선 여자의 방문을 받고 현실과 환각의 경계에서 삶이 흔들린다. 김 배우는 ‘빈집’ 언론공개회 때 아나운서 출신의 변신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최불암 선생님의 권유로 연극을 하게 됐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는 최 배우 타계 후 장례 기간 내내 절제 있으면서도 깊은 슬픔에 잠긴 모습으로 유족과 함께 했다. SNS에 올린 추모의 글을 통해선 “나도 몰랐던 나의 꿈을 열어 주셨고 아기가 옹알이 하듯 작고 하찮은 변화 하나에도 그리도 뿌듯하게 기뻐하시며 응원해주셨던 선생님이고 아버지셨다”라며 지극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최 배우는 평소 아끼는 후학들과의 술자리에서 종종 시음(詩吟)을 즐기곤 했다. 시단에서 활약하는 현역 시인들과도 교우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닌 신달자 시인 등이 오랜 지음(知音)이었다. 신 시인도은 최 배우가 타계하자, “다시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라고 탄식하며 지극한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신 시인은 지난해 불교문예잡지 ‘유심’ 인터뷰에 최 배우를 초대했고, 최 배우는 와병 중에도 응한 바 있다. 지난 2013년엔 신 시인이 이끄는 시인협회가 주관한 청소년 시낭송 축제에서 최배우가 특별위원장으로 활동한 인연이 있다.
최 배우는 ‘유심’ 인터뷰를 통해 배우로서의 삶 뿐 만 아니라 한국 시문학사를 빛낸 인물들에 그리움을 고백했다. 이때 김광균 시인의 ‘와사등’을 암송하며 자필로 쓰기도 했다.
최 배우는 청소년기에 어머니(이명숙 여사)가 운영했던 명동 주점 ‘은성’에서 만났던 시인들에 대한 기억이 노년까지 따라다닌다고 했다. 박인환과 오상순, 변영로, 이봉구, 그리고 천상병 ….
그는 자신이 만났던 시인들은 가난했지만 낭만과 꿈이 있었다고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주변의 후인들에게 이렇게 말한곤 했다. “꿈이 있어야 인생이 맛있어. 꿈이 밥이요, 글이요, 역사가 되는 거지.”
장재선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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