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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황지희의 예술에기대어〉서늘한 기술의 시대, 도슨트가 사라지지 않는 ...

미래에 사라질 직업 10위, AI 시대에 살아남을 직업 10위 등의 콘텐츠가 미래에 대한 우리의 불안을 여실히 드러낸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 기계로 대체되며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까지 대두되는 시점이다. 지금부터라도 AI...

황지희의 예술에기대어〉서늘한 기술의 시대, 도슨트가 사라지지 않는 ...

미술관. 출처 PxHere

사람들로 가득 찬 미술관, 작품과 네모난 화면을 번갈아 보는 시선과 손끝의 움직임만이 공간의 여백을 채운다. 미술관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요즘의 풍경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대체되는 지금의 시대.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지가 우리의 알고리즘을 장악하고 있다. 미래에 사라질 직업 10위, AI 시대에 살아남을 직업 10위 등의 콘텐츠가 미래에 대한 우리의 불안을 여실히 드러낸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 기계로 대체되며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까지 대두되는 시점이다. 지금부터라도 AI 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농담 섞인 한 뇌과학자의 조언이 공포로 다가온다.

도슨트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안내자다. 큐레이터와 혼동되곤 하는데 큐레이터는 전시를 기획하는 일을 하고, 도슨트는 작품을 보다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직업처럼 도슨트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큐알코드로 제공받는 작품 설명은 군더더기가 없다. 정해진 시간에 알맞은 언어로 정확하게 전달된다. 작품 정보를 원할 때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존재다. 하지만 사람은 진정 이런 정보만을 원할까?

우리는 창작자가 빈틈없이 완성한 음악을 몇 번의 터치로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도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며 공연장을 찾아간다. 플랫폼으로 듣는 음악이 더 깔끔하지만 우리는 공간을 찾는다. 여기에 사람인 도슨트의 존재이유에 대한 나의 답이 있다. 사람들은 완벽함을 기대하며 공연장을 방문하지 않는다. 실제 인간이 만들어내는 순간의 생생함을 느끼기 위해 편리함보다는 불편함을 택한다. 기계의 완벽함이 사람이 줄 수 있는 생동감을 대신할 순 없다.

도슨트는 해설 도중 감정이 전이되어 목소리가 떨릴 수도 있고, 실시간 공기에 반응해 즉흥적으로 설명을 바꿀 수도 있다. 던져지는 질문에 경험을 담은 답으로 감정적 울림을 줄 수도 있고, 역으로 질문을 던져 관람객의 공감을 이끌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AI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날것의 가치이다. 기계와 지식의 정확도를 다투는 대신 정보를 등 뒤에 업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사람. 인간만이 건넬 수 있는 질문을 만들어 내는 이는 대체되기 어렵다. 그것이 도슨트가 가진 진짜 경쟁력이다.

2년 전, 타오르는 한 여름의 무더위에 지쳐가던 어느 날.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사람들이 미술관으로 모여들었다. 20세기 한국 미술의 거장들이 남긴 발자취를 볼 수 있는 ‘한국미술명작전’에서 감사의 마음을 담은 환한 미소로 오전 해설을 마무리했다. 점심시간이 지났을 무렵, 해설을 들었던 관람객 중 한 명이 미술관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그 친구의 꿈이 작가라는 사실과, 미술을 향한 넘치는 애정을 눈빛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진심으로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와닿아, 의재미술관에서 구매했던 의재 허백련 선생이 즐겨 마신 춘설차를 선물로 건넸다. 나의 작은 응원이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그 반짝이는 눈망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작은 나눔으로 오히려 큰마음을 되돌려 받았다. 각자의 서사를 품고 찾아오는 관람객들과 만남의 장을 만들어주는 미술관. 이곳에서 나는 인생을 배우고 사람을 경험하며, 타인과 나를 향한 애정을 키워나간다. 미술관은 나의 성장과 치유의 공간이다.

인생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생채기를 안고 살아간다. 이 흔적의 대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상처 낸 결과이지만 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작가의 삶과 작품도 보는 이를 치유할 수 있다. 행복의 순간을 담은 작품은 고단한 하루 중 인생의 따스함을 불러일으킨다. 작품 속 작가의 아픔과 고뇌는 바라보는 이의 상처와 공명하며 위로의 품을 내어 준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은 관람객 또한 그 길에 참여시켜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 함께하도록 이끈다. 예술은 위로를 넘어 회복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우연함으로 평범한 전시 관람객이었던 나는 예술을 전하는 안내자가 되었다. 미술관에서의 다채로운 경험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때로는 눈물을 줄 것이다. 나의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일상에 작은 유희가 되기를 바란다. AI 시대의 편리함에도 사람들은 불편함을 가진 사람을 찾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인 도슨트가 사라지지 않을 이유이고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서늘한 기술의 시대, 나는 기꺼이 온기를 품은 불편한 안내자가 되려 한다.

황지희 광주시립미술관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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