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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히말라야 쓰나미에 비친 대한민국

히말라야 쓰나미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높이 5200m 높이에서 떨어진 빙하와 암석의 충격으로 9m의 높이로 치솟은 강물이 토사와 함께 협곡을 시속 170㎞가량으로 내달려 마을들을 덮쳤다.

[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히말라야 쓰나미에 비친 대한민국

히말라야 쓰나미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높이 5200m 높이에서 떨어진 빙하와 암석의 충격으로 9m의 높이로 치솟은 강물이 토사와 함께 협곡을 시속 170㎞가량으로 내달려 마을들을 덮쳤다. 인간의 감각과 인지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재해인 것이다. 2000년 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하루아침에 파묻힌 폼페이처럼 정말 아무 준비도, 대책도 없이 많은 마을과 목숨이 히말라야 쓰나미로 파묻혀 버렸다. 하지만 이번 히말라야 쓰나미가 폼페이의 경우와 다른 점을 말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이다. 이번 히말라야 쓰나미는 명백한 인재이기 때문이다.

지난 9월3일자 경향신문에는 네팔의 환경단체 활동가 프라카시 다할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는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는 사실을 이미 “산이 경고했고, 강이 경고했고, 학자들도 경고”했다고 말하면서 히말라야 쓰나미는 이른바 경제 선진국이 저지른 죄라고 또박또박 밝혔다. 사실 기후위기로 인해 히말라야 빙하가 녹아 어느 시점이 넘으면 아시아 전역에 대기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금 다시 회자되기도 하지만, 중국의 황하나 양쯔강, 인도차이나반도로 흐르는 메콩강, 인도로 흐르는 갠지스강 등의 발원지가 히말라야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로 설산이 점점 사라지면 강물 수량이 줄어들 테고 그렇게 되면 농업용수와 생활용수가 부족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기근과 인구 이동으로 이어지며 국제 지정학에도 영향을 줘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고도 했다. 간단히 말해 기후위기는 문명의 종말을 의미하는데 그 구체적 양상들을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이번 재해의 가해자는 경제 선진국

기후위기로 인한 삶의 위기는 선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녹던 사탕을 언젠가 깨물어 먹을 수도 있듯이, 갑작스러운 급변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비유를 들어 경고한 기후학자가 있었다. 어릴 적에 고드름이 녹는 과정을 양지바른 처마 밑에서 바라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고드름도 녹는 물을 뚝뚝 떨어뜨리다가 어느 순간에는 통째로 낙하한다는 것을. 히말라야 쓰나미가 빙하 때문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나는 가장 먼저 녹는 고드름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당연히 이것은 추억의 되새김질이 아니다. 빙하가 고드름처럼 천천히 녹다가 갑자기 전체가 떨어지는 것은 그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시르 카날 네팔 외교장관이 피해 복구를 선진국의 원조가 아니라 ‘정의와 배상’ 차원으로 전환해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묻겠다고 한 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다. 이른바 경제 선진국들은 이번 히말라야 쓰나미의 명백한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이 예외일 리 없다. 대한민국은 온실가스 누적 배출량 부분에서 세계 14위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는 네팔 정부에 배상하고 피해 복구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국민 보호’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도 이번에 희생된 네팔 국민들에 앞서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오늘날 ‘국익’이 무슨 절대 진리인 것처럼 말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에 아무 말도 못하는 바보가 됐지만, ‘국익’이야말로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고 민중의 연대를 가로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우리가 참된 문명을 말하려면, 일본의 평화사상가 다나카 쇼조의 말처럼,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국익보다 먼저 생각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참된 문명과 멀어지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산을 황폐하게 하고(송전탑), 강을 더럽히고(댐), 마을을 부수고(반도체 공장), 사람을 죽이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맹목이 과연 정부와 여당 등 집권 세력만의 문제일까? 이재명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지식인들, 언론들, 유명 유튜버나 정치평론가들 그 누구도 과도한 산업화와 지나친 부의 축적이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임을 말하지 않는다. 언론마저 탐욕스러운 경제성장 앞에서는 발길을 돌리며 딴소리를 해댄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언어는 ‘꽥꽥일률’(이반 일리치)처럼 소음에 가까워졌다.

우리도 기후 제국주의 ‘신민’일지도

물론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하지만 상상력이 당면한 현안에 갇혀버리면, 결국 그 ‘잘난’ 언어들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소음으로 변질되는 건 필연적이다. 히말라야 쓰나미에 대한 경제 선진국들의 책임을 말하다가 난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 기후 제국주의의 ‘신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킨 19세기 유럽의 시민들이 자국의 식민 지배에 눈을 감으면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것은 가공할 두 번의 세계대전이었다. 두려운 것은, 기후의 변화가 도덕적 감수성을 마비시키면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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