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란 협상이 끝내 결렬되고 미국이 이란 항만을 겨냥한 해상 봉쇄에 나서면서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에너지 리스크가 다시 폭발하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공급의 핵심 통로가 흔들리자 국제유가는 급등했으며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는 이번 위기가 에너지 체질 전환을 압박하는 ‘구조적 신호’로 읽히고 있다.
오만 시나스 앞바다의 호르무즈 해협에서 액화석유가스(LPG) 운반선이 정박해 있다. 사진= 연합뉴스
호르무즈發 에너지 쇼크…유가 100달러 재돌파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이끈 미·이란 고위급 협상이 12일(이하 현지시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최종 결렬됐다. 밴스 측은 이란이 핵 프로그램 포기를 거부했다고 설명했고, 이란은 미국의 요구가 과도했다고 맞섰다.
협상 결렬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 해군에 호르무즈를 둘러싼 강경 조치를 지시, 미 중부사령부는 13일부터 이란 항만을 드나드는 모든 해상교통을 봉쇄하겠다고 발표했다.
형식상 비이란 목적지 선박의 통과는 허용됐지만 시장은 이를 호르무즈 전체의 항행 자유가 다시 군사적 변수에 들어갔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이른바 '글로벌 에너지 대동맥'이라고 불리는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세계 최대 원유 수송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하루 평균 약 2000만배럴의 원유와 석유제품이 이곳을 통과하며 이는 전 세계 해상 원유 교역의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도 호르무즈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석유 수송 병목지점으로 규정하고 있다. LNG(액화천연가스) 역시 2024년 기준 글로벌 거래량의 약 20%가 이곳을 지났다.
호르무즈의 긴장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 안정성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정학적 불안을 넘어 실제 물량 공급에 차질을 빚자 국제유가는 수직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13일 브렌트유는 7% 넘게 뛰며 102달러 안팎, WTI는 104달러대로 올라섰다. 이달 초엔 호르무즈 혼란 심화로 현물 원유 가격은 배럴당 150달러에 근접했다.
최근 호르무즈 항행은 선사들의 회피와 대기 증가로 사실상 위축된 상태며 해상 보험료와 운송 비용 역시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사우디 동서 파이프라인 등 일부 우회 경로가 존재하지만 전체 중동 수출 물량을 대체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점도 시장 불안을 키우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받는 타격이 직접적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61%, 나프타의 54%가량이 호르무즈 경로에 의존하고 있다.
호르무즈 리스크는 국내 정유·석유화학 산업의 원가 상승으로 직결되고 나프타 가격 급등은 NCC(나프타분해설비) 수익성 악화로 이어진다.
여기에 고유가는 전력·가스·물류 비용을 동시에 끌어올리며 제조업 전반과 소비자 물가를 압박하고 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을 넘어 국가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흔드는 연쇄 파급 효과가 나타나는 셈이다.
실제 한국 정부는 원유 수급 경보를 올리고 대체 도입선 확보, 에너지 절약 조치, 추경 검토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서산비축기지 모습. 사진=한국석유공사
고유가가 앞당긴 에너지 전환 시계
이번 사태는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있다.
산업연구원이 12일 발표한 '에너지 안보 위기와 신산업 구조 개편' 보고서에 따르면 고유가 국면은 단기적으로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 비용을 상승시키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화석연료 발전의 경제적 이점을 소멸시켜 전환 속도를 2배 이상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실제 전환 속도는 전력망 투자 부족, 금리 부담, 핵심 광물 공급망 문제 등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위기가 곧바로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책·투자·인프라가 동시에 뒷받침될 때 구조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글로벌 주요국은 이미 방향을 잡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6일 중동 전쟁에 따른 에너지 충격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 구축을 빠르게 추진한다고 강조하며 풍력·태양광 확대와 함께 원전의 안전한 확장, 수력 개발을 언급했다.
류전화민 중국 기후특사는 12일 신화통신 인터뷰에서 "호르무즈 사태는 특정 지역 갈등이 아니라 전 세계적 에너지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불확실한 화석연료 공급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국이 재생에너지 비중을 공격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글로벌 에너지 주도권이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자국 내 생산 가능 에너지'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원유·가스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고착화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화 중심의 에너지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LNG의 경우 단기적으로 유효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에는 여전히 해상 수입 의존도가 높다는 한계가 있다.
태양광과 풍력을 확대해 연료 수입 비중을 줄이고 원전을 통해 기저 전력을 확보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송전망과 에너지저장장치(ESS)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주 한림해상풍력 전경. 사진=한국전력
풍력·태양광·원전…한국형 에너지 믹스 시험대
에너지 전환의 핵심 축으로 꼽히는 풍력은 특히 해상풍력을 중심으로 확대가 추진되고 있다.
정부는 전남 신안과 울산 앞바다를 중심으로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난 9일 금융위원회는 신안우이 해상풍력 발전사업을 위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금융 약정식을 개최한 바 있다.
다만 인허가 지연, 주민 수용성, 계통 연결 문제 등으로 실제 사업 속도는 기대에 못 미치는 상황이다. 국내 최대 규모인 한림해상풍력이 준공됐지만 유럽이나 중국 등 글로벌 수준에 비교하면 한국 해상풍력은 여전히 초기 확산 단계라는 평가다.
태양광은 가장 빠르게 확대 가능한 전원으로 꼽힌다.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100GW(기가와트)까지 확대해 발전 비중 20%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재생에너지 보급 ·금융 예산도 1조1000억원에서 1조5000억원으로 늘렸다.
RE100(재생에너지 100%)을 이행해야 하는 대기업들이 발전사와 직접 계약하는 '직접 PPA(전력구매계약)’ 시장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농지와 태양광을 공유하는 영농형 태양광과 도심 건물 일체형 태양광(BIPV) 등 유휴 부지를 활용한 모델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봄·가을철 전력 수요가 낮을 때 발생하는 출력 제어 문제, 입지 갈등, 중국산 의존도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원전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부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대형 원전 2기와 SMR(소형모듈원자로) 700MW(메가와트) 도입을 공식화했다.
특히 최근 국회를 통과한 SMR 지원법은 한국형 SMR(i-SMR) 기술 개발과 상용화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원전은 고유가 시대 가장 저렴하고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수단으로 꼽힌다. AI 데이터센터 열풍으로 폭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원전의 역할이 더 강조되고 있다.
체코 원전 수주 성과를 바탕으로 한 'K원전' 수출 전략과 함께 국내에서도 노후 원전의 계속 운전 및 방폐장 부지 선정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난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가 관건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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