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악’ 공급망 붕괴 평가
19일(현지시간) 미국 피츠버그의 한 미니마트 주유소 앞을 차들이 지나가고 있다.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이솜 기자]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 전쟁이 글로벌 에너지 시스템과 경제 전반에 장기적 충격을 가하고 있다. 원유와 가스 공급 차질이 심화되면서 세계 각국은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가격 상승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2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번 전쟁으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악몽 같은 시나리오’에 직면했다. 공급이 크게 줄어들면서 전 세계 소비자들이 높은 비용을 부담하는 동시에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게 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란 연안의 좁은 해협인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20%가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 이후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상호 보복 공격이 가스전, 정유소, 터미널 등 중동의 핵심 에너지 기반 시설을 직접 타격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파손된 시설을 복구하는 데만 수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번 사태를 1973년 아랍 석유 금수 조치를 넘어선 ‘역사상 최악의 글로벌 에너지 중단 사태’로 규정했다.
피커링 에너지 파트너스의 댄 피커링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로이터에 “절약만으로는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없을 것”이라며 “결국 사람들이 소비를 중단할 정도로 가격이 높게 치솟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까지 이번 위기로 시장에서 사라진 원유는 약 4억 배럴로 추정되며 이는 전 세계 4일 치 공급량에 해당한다. 이 영향으로 유가는 전쟁 전 대비 약 50% 급등했다. 리스타드 에너지의 아디티야 사라스와트 수석 부사장은 “연료, 화학제품, LNG, 비료 원료에 이르기까지 위험에 처한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점이 과거 걸프 지역의 긴장 상황과 질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로이터에 분석했다.
국제 벤치마크 유가는 전쟁 시작 후 50% 이상 올라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했다. 아시아 경제의 주축인 중동산 원유의 경우 배럴당 164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 정부는 공급 보존을 위해 강력한 조치를 시행 중이다.
태국은 공무원들에게 해외여행 중단과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이용을 명령했으며 방글라데시는 대학교 문을 닫았다. 스리랑카는 연료 배급제를 도입했고 중국은 정제 연료 수출을 금지했다. 영국 정부는 연료 절감을 위해 제한 속도 하향을 포함한 비상 계획을 검토 중이다.
유럽의 항공유 가격은 배럴당 220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해 항공권 가격 상승이 불가피해졌다. 미국 내 소매 가솔린 가격 역시 갤런당 약 4달러로, 전쟁 전보다 1달러 이상 올랐다.
가스 시설에 대한 공격은 가스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다. 지난 18일 이스라엘이 이란의 사우스파 가스전을 공격하자 이란은 이튿날 카타르의 대규모 라스 라판 LNG 단지를 타격하며 맞불을 놨다. 카타르에너지의 사드 알 카비 최고경영자(CEO)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의 공격으로 연간 1280만톤의 LNG 생산이 중단될 것이며 이는 세계 공급량의 약 3%에 해당한다”며 “복구에는 3년에서 5년이 소요될 것”이라고 밝혔다.
◆식량 안보 위협 및 반도체 공급망 차질 우려
에너지 위기는 식량 공급망으로도 전이되고 있다. 전 세계 비료 교역량의 약 3분의 1이 호르무즈 해협에 묶이면서 핵심 비료인 요소 가격이 전쟁 전보다 30~40% 폭등했다. 인도,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의 비료 공장들은 원료 부족으로 생산 감축이나 가동 중단에 들어갔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막시모 토레로 수석 경제학자는 “이 상황이 몇 주만 더 지속되면 전 세계 곡물, 사료, 유제품, 육류 공급에 중대한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이는 파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우려했다.
첨단 산업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카타르 가스 시설 파손으로 반도체 제조의 핵심 원료인 헬륨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카타르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헬륨 생산국이다. 전 경제 고문 사미라 파질리는 이날 악시오스에 “헬륨 공급 제한은 대만의 반도체 제조 능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이는 자동차에서 식기세척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품의 공급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의 여파가 종전 이후에도 수개월에서 수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캐피털닷컴의 카일 로다 선임 분석가는 악시오스에 “생산 역량이 상당 기간 오프라인 상태가 될 것이므로, 에너지 가격은 상승할 때보다 훨씬 천천히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경제적 충격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큰 정치적 부채가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대중에게 전쟁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한편, 지원에 소극적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동맹국들을 향해 “겁쟁이들”이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월가와 연방준비제도(Fed)는 올해 인플레이션 전망치를 상향 조정하고 국내총생산(GDP) 및 소비자 지출 기대치를 낮추고 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올해 미국 소비자 지출 성장률이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13년 만에 최저치인 1.9%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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