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한일합섬 기억 찾기-언니야 보고 싶다 (4) 연구자들
한일합섬·여실고 연구 기록 중요성 역설
“마산 있게 한 여성들 재평가 받아야”
“개인 아닌 구조적 문제로 들여다봐야”
기획 보도 ‘마산 한일합섬 기억 찾기-언니야 보고싶다’는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에서 일하고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에서 공부한 이들을 찾고 그들의 10대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한일여자고등학교는 건실하게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지만, 8만 9000여 평을 채웠던 한일합섬은 이제 흔적조차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일하고 울고 웃었던 이들의 기억이라면 지역사, 노동사, 산업사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풍부한 자원이 될 것이라 여겼다.
‘언니야 보고싶다’는 그곳에서 일했던 언니야들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왜 그들이 기억돼야 하는지 그 이유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한 이정희 경남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 문경희 국립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 교수와 각각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기억의 의미를 정리했다.
“당시 여성 삶으로 지역사 재평가해야”
경남여성가족재단이 2023년 11월 15일부터 26일까지 동남아트센터 2층에서 진행한 전시 <한일합섬 일하고 공부하고 꿈꾸다> 전시 모습. /주성희 기자
한일합섬 본사는 마산에 있었고, 경기 수원, 대구에도 공장과 산업체 부설학교를 뒀다. 특히 수원은 한일합섬 공장을 정리하고 그 부지 위에 한일타운 아파트를 세웠는데 그 전후로 지역 사회에 일어난 모습이 마산에서 일어난 양상과 비슷했다.
경남여성가족재단이 진행했던 ‘경남여성 생애구술사’를 책임졌던 이정희 경남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수원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산업체 부설학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2022년 5월 경남여성 생애구술사 주제를 생애구술사 편찬위원회에서 결정할 때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가 첫 번째 주제로 돼야 한다는 의견이 모였다.
이 연구위원은 “편찬위원 연령대가 20~50대로 폭이 넓은데 20·30대 위원들이 산업체 부설학교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서 “한 세대만 넘어가도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그 흔적도 너무 미미하니 동시대에 살면서도 한일합섬·한일여실고가 잊힐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한일합섬에서 일하고 한일여실고에서 공부했던 이들의 삶을 늦기 전에 기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애구술사 연구에는 기록전문가 양성 과정 수료생으로 구성된 공동필진이 참여했다. 구술자는 졸업생 8명, 구술참여자 1명으로 인터뷰는 2시간씩 2회에 걸쳐서 이뤄졌다. 구술참여자는 1977년에 졸업한 1회 졸업생부터 7회 졸업생까지 있다. 산업체 학교가 처음 등장한 배경인 여공 담론 자체가 1970년대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여성의 대학 진학 기회가 확대돼 학교에 가기 위해서 공장에서 일한다는 열의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고 한다.
또 1970년대 생산 현장에 뛰어든 여공 경험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보편적 경험이었다. 1980년대에는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한일합섬에서 일하며 한일여실고에서 공부했던 박만자·김수옥·김영수·안경매·천은미·박경순·지현영·석옥선 졸업생과 퇴직한 황경희 교사 구술을 진행했다. 2023년 5월 연구보고서 <한일합섬, 일하고 공부하고 꿈꾸다>가 발간됐다.
경남여성가족재단이 2023년 11월 15일부터 26일까지 동남아트센터 2층에서 진행한 전시 <한일합섬 일하고 공부하고 꿈꾸다> 전시 모습. /주성희 기자
2022년 6월에는 수기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때는 당시를 기억하는 모든 이가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공모전 수상작과 졸업생들의 한일합섬·한일여실고 관련 기록물을 모아 창원 동남아트센터 2층 라운지에서 전시 <경남여성 아카이빙: 한일합섬, 일하고 공부하고 꿈꾸다>를 열었다.
이 연구보고서는 꾸준히 인용되고 있다. 한일합섬·한일여실고를 이야기할 수 있는 뿌리가 됐다.
지난해 12월에는 창원 영화 제작소 빛공방이 영화 <다시 부르는 소녀들의 이름>을 발표했다. 장가영·김진·이기혜 감독 중 장 감독은 ‘경남여성 생애구술사’ 기록전문가 중 1명이었다. 그는 생애구술사에 참여하면서 한일합섬·한일여실고 역사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고 영화로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연구위원은 “그들의 고생으로 지금의 마산을 만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전국에서 7대 도시라 불리던 때로 돌아가려면 마산을 일으켜 세웠던 여성들을 들여다보면서 지역사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면서 “어쩌면 마산을 떠난 청년들을 불러 모을 방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월 22일에 국립창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가 연 세미나에 참석한 문경희(왼쪽에서 여섯 번째) 교수와 이정희(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연구위원. /주성희 기자
“개인과 기업의 기억을 구조적으로 살펴야”
문경희 교수가 한일합섬 사보를 펼쳐보이면서 기억의 정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성희 기자
한일여실고와 한일합섬은 여러 졸업생에게 가난 속에서도 공부하고 일했던 가치 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반면 산업화 과정에서 값싼 여성 노동력이 동원된 공간이라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 같은 공간을 두고 다른 기억이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
문경희 국립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이를 ‘기억의 정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마산 한일여고 ‘여고생’들에 대한 서사와 기억의 정치’에서 한일여자고등학교 내 50년관,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발행한 한일합섬 사보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두 소재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50년관 전시는 1974~1979년 특성 시기에 이미지와 문구를 집중적으로 재현했다. 이를 보고 문 교수는 1970년대 여공에 대한 산업화 희생양 담론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봤다. 희생양 담론이란 산업화를 위해 여성들이 희생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각이라고 보면 된다.
기억의 정치를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사람은 과거를 그대로 기억해서 재현하지 않는다. 무엇을 중요하게 기억할지,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 등을 고르는 것은 정치적 행위가 된다. 현재 자신과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지닌다.
이런 기억의 정치 관점으로 보면 50년관은 학교와 기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비추기도, 감추기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은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한일합섬 사보도 마찬가지다.
문 교수는 “연구에서 정치·경제적 맥락을 읽지 않는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미화될 수 있고 국가와 산업 자본의 노동력 동원을 정당화하는 서사로 활용될 수 있다. 반드시 비판적인 관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기억 정치의 장에서는 산업체 부설학교의 유일한 수혜자가 전국 소녀들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문 교수는 수혜자가 소녀뿐 아니라 한일합섬 등 기업과 박정희 정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은폐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짚었다.
문 교수는 구조 속에서 개인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공부하고 일했던 이들이 온순하고, 가족을 살리고 국가를 살리고, 기업을 살렸던 단순한 주체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게 우리가 현재 그들을 소환하는 목적이 돼야 한다”라면서 “그들이 했던 일들을 인정하고 그들이 겪었던 괴로움은 개인이나 가정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 국가적인 빈곤 문제, 독재자 통치받았던 정치·경제적 상황 등에 놓여있었음을 알고 큰 맥락에서 자기 삶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시절 한일합섬·한일여실고 언니야들을 더 만나고 싶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으신 분은 주성희 기자(010-9211-4818·hear@idomin.com)에게 연락주세요.
/주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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