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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라산 설원 속에 깔린 기다림과 수행의 시간

모든 것을 즉물적으로 묻고 풀이하는 인공지능 시대의 인식 태도와는 한참 다른 성실한 기다림과 수행의 사진이다. 이런 미덕을 지닌 작가의 신작 ‘북극성, Polaris’ 연작 8점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서울 청담동 갤러리...

한라산 설원 속에 깔린 기다림과 수행의 시간

장민승 사진전 ‘북극성, Polaris’

장민승 작가가 올해 만든 새 연작 ‘북극성 Polaris #4314’의 세부. 노형석 기자

길이 2m에 이르는 사진 속에서 눈보라가 몰아친다. 눈발이 사방에서 거세게 날아들고 온통 허연빛에 덮여 어디가 경계인지도 알기 어려운 설원이다. 그곳에 무언가 거무스름한 덩어리들이 파묻히거나 널려 어렴풋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화산토 혹은 화산암의 자취들이다.

장민승(44) 작가는 지난해와 올해 제주섬 한라산 기슭의 설원에서 눈보라와 화산 대지가 광포하게 어울리는 모습들을 집요하게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작가 내면의 물음을 거듭한 산물로 보인다. 저 허옇고 육중한 눈밭 속에 무엇들이 깔려 있는가. 이 섬에서 굴곡진 삶을 펼쳐놓고 사라진 사람의 몸, 짐승의 몸이, 그리하여 자연과 역사를 이룬 시간의 층들이 보이는가. 그렇게 물음과 반문을 거듭하면서 시선을 집중시키자 화산암 바윗덩이, 흙들도 생명성을 지니고 사람이나 동물의 일면을 닮은 상으로 다가왔다. 생각을 담고 자연의 피사체를 바라보는 응축된 시선은 보는 이에게도 각자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다양한 생명의 형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즉물적으로 묻고 풀이하는 인공지능 시대의 인식 태도와는 한참 다른 성실한 기다림과 수행의 사진이다.

장민승 작가가 올해 제작한 새 연작 ‘북극성 Polaris #7025’의 세부. 노형석 기자

이런 미덕을 지닌 작가의 신작 ‘북극성, Polaris’ 연작 8점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서울 청담동 갤러리 508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현장이다. 그는 지난 20여년간 영상설치작과 사운드아트, 사진, 디자인 등의 다기한 장르 작업을 통해 자연과 생명에 대한 사유를 풀어왔는데, 이번 전시는 근래 찍은 사진들로만 추렸다는 점이 이채롭다.

‘북극성’이란 작품 제목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하늘의 정북에 자리 잡아 항해하는 배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온 별이지만, 새 연작들의 배경은 쌓인 눈의 허연빛이 시계를 뒤덮은 화이트아웃(백시 현상)으로 별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 백색의 감옥과도 같은 공간이다. 이 광포한 설경 속에 등장하는 화산석들은 가까이 가서 보면 다채로운 존재의 결들을 보여준다. 울퉁불퉁한 암면의 틈새에 흰 눈을 이고 붙어 있는 작은 풀과 이끼들, 우묵 파들어간 돌덩이 아래의 음영, 거무스름한 큰 바위 곁에 엷은 획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작은 바윗덩이 자취들…. 눈보라와 짙은 안개 속에서 포착해낸 화산암의 표면은 제주와 한라산이 품은 근현대사의 비극과 지구의 대자연이 직면한 기후위기의 실상을 암시하는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장민승 작가의 2023년작 ‘수취인불명 96691’. 노형석 기자

작가는 2019년 전시에서 황석영 작가의 등반 소설 ‘입석부근’의 텍스트를 화두로 삼아 설악산 토왕성폭포의 이미지를 펼치면서 대자연의 원초적 사물성에 탐닉하는 작업을 본격화하겠다고 알린 바 있다. 한라산 설원의 심상적 풍경들을 파고든 이번 전시는 그의 작업 흐름이 장소와 기억, 시간에 대한 탐구로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변의 모래벌판에 박힌 유리 조각이 풍화로 닳디닳은 세부를 찍은 ‘수취인불명’ 연작과 풍랑경보가 내려진 2022년 강릉에 고립됐을 당시의 해변 풍경을 포착한 ‘풍랑주의보’ 등 다른 출품작들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출품작 중 일부는 그의 작업 단짝이자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의 앨범 ‘리슨’의 커버에 쓰이기도 했다.

장 작가는 1980~90년대 한국 영화판을 풍미했던 장선우 감독의 아들로, 지난 20여년간 영화음악과 가구 디자인, 사진, 영상설치 등을 오가며 작업해왔다. 경남 함양의 방재림 숲속을 주유하는 영상물 ‘상림’을 내보였고, 검은 바다와 일본 하이쿠 시구를 결합시켜 세월호의 비극을 이야기한 영상 설치물 ‘검은 나무여’로 2014년 에르메스미술상을 받았다. 전시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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