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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택시 쉬는 날 이발가위 들고 어디든 갑니다”

광주 개인택시 기사 선평식(76)씨는 쉬는 날이면 낡은 가위집을 들고 경로당을 찾아 간다. 선 씨는 40여 년 동안 광주와 전남 곳곳을 돌며 이·미용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택시 쉬는 날 이발가위 들고 어디든 갑니다”

“택시 쉬는 날 이발가위 들고 어디든 갑니다”

40년간 이·미용 봉사활동…광주 개인택시 기사 선평식씨

경로당·소록도 찾아 봉사…코로나 때 어르신 가정 직접 방문

5·18 참상 속 광주 정착…광주시장 표창 4회·장관상 등 수상

2026년 09월 09일(수) 19:30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이·미용 봉사를 하고 있는 선평식 기사. <선평식 기사 제공>

광주 개인택시 기사 선평식(76)씨는 쉬는 날이면 낡은 가위집을 들고 경로당을 찾아 간다. 선 씨는 40여 년 동안 광주와 전남 곳곳을 돌며 이·미용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보성군 득량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앞 이발소 보조로 들어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월급 600원을 받으며 시작한 이발 일은 그의 평생 기술이 됐다. 부산과 서울의 미용실에서 월급쟁이로 실력을 쌓았고 군에 입대해 36개월 동안 이발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전역 후 사회로 나와 부산에서 이발소를 다녔지만 당시 장발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사정이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광주에서 개인택시를 하던 큰형님으로부터 “택시 수입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 1980년 1월 광주 영업택시 기사로 정착하게됐다.

“광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했어요. 위험천만한 상황을 여러번 겪었는데 시민군들을 외면할 수 없었죠. 도망가는 시민군을 택시에 태워주기도 하고, 버스, 택시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죠. 그 강렬했던 기억을 안고 지금까지 광주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광주에 정착한 지 두 달 만인 1980년 3월부터 자발적으로 이·미용 봉사에 나섰다. 영업용 택시 휴무일인 일주일에 하루, 이발 기구를 들고 무작정 경로당을 찾아간 것이 시작이었다. 연탄을 때며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 공짜로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주는 선씨의 방문은 어르신들에게 큰 기쁨이었다.

1991년 개인택시 자격을 취득한 뒤 한 달에 10일에 달하는 휴무일을 모조리 봉사에 바쳤다. 월산동 경로당을 시작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학동, 광천동 등 여러 경로당에서 그를 찾는 어르신들이 늘어났다.

“깔끔하게 머리를 잘라드리고 나면 어르신들이 좋아하며 머리를 매만지는 표정이 좋아요. 고마움의 표시로 ‘야쿠르트 사 먹으라’며 주머니에 꼬깃한 1000원을 쥐어주시기도 하죠. 다음 달 언제 오냐고 알려드리면 시간 맞춰 경로당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미용이 끝나고 나누는 따뜻한 악수와 포옹이 제겐 돈보다 더 귀해요. 한 번 봉사할 때 20명이 넘는 어르신 머리를 손질하다 보면 허리와 팔이 시리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힘이 납니다.”

선 씨의 봉사는 광주시 내 경로당에만 머물지 않았다. 장성군 북이면을 비롯해 군수의 허가를 받아 미용사와 목사 등을 모아 봉사단을 꾸린 뒤 청포도와 쌀을 들고 소록도까지 찾아가 따뜻한 손길을 건넸다.

코로나19 여파로 경로당이 문을 닫았던 4년 동안도 그의 봉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상황을 알려 치매를 앓거나 휠체어를 타는 거동 불능 어르신들의 집을 직접 찾아가 목욕을 돕고 머리를 손질해 줬다. 어르신들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 사비로 면도기 1000개 이상을 선물했고, 연탄 300장을 직접 날라 전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자발적 봉사를 이어온 그는 보건복지부 장관상과 국무총리실 간담회 선행상 등을 수상했다.

선씨는 “힘이 닿는 데까지, 택시 운전을 계속하는 날까지 가위를 놓지 않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김다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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