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서울 바깥의 마음
차도까지 나가 손을 흔들어야 탈 수 있었던 버스
서울에 오니, 인사 건네는 기사님을 만났다
좋은 일자리와 빠른 정보, 윤기 나는 서울이지만
손을 흔들어도 멈추지 않는 건, 집값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소도시에 살았던 성해나 작가는 서울에 살게 되면서 가장 이채로웠던 것은 “버스에 탑승할 때마다 인사를 건네는 기사님”이었다고 말한다. 사진은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광화문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승객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클립아트코리아
서울 바깥에서 서울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오직 서울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기대와 흠모, 동경, 흥미를 가진 이가 있는가 하면 질투와 분노, 절망을 느끼는 이도 있다. 서울 바깥에 사는 또는 살아본 적 있는 여섯명의 작가가 서울 바깥의 마음을 정확히 응시한다.
내가 살던 지역에는 버스 탈 때 지켜야 할 일종의 조례가 있었다.
1. 버스 탈 때는 무조건 차도까지 나와 손 흔들기
2. 기사님께 ‘○○동 가요?’ 따위의 질문 절대 하지 않기
3. 배차 간격이 지켜지지 않거나 버스가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끊겨도 허허하며 쿨하게 넘기기
4. 버스가 방지턱을 턱턱 넘거나 좌, 우회전 시 코너를 급히 돌아 혹여 넘어져도 가볍게 털고 일어나기
서울에 정주해온 이들에게 이 얘길 들려주면 다들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거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본다.
“거짓말하지 마.”
애석하지만, 사실이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의 조례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어린 나는 으레 서겠거니 버스를 기다리다 한시간을 공쳤다. 정류장에 서서 간절한 눈빛을 보내도 버스는 떠났다. 울상 짓는 나를 보다 못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학생, 여기 안 살아?”
아주머니는 차도까지 나가 히치하이킹하듯 팔을 흔들며 몸소 시범을 보이더니 “여기 버스는 이렇게 해야 서” 하고는 유유히 떠났다. 그뿐인가. 이 차가 디(D) 병원에 가느냐, 묻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께 다짜고짜 욕을 퍼붓던 기사님을 보며 경악한 적도, 과속 때문에 멀미한 적도 부지기수다.
몇년 전까지 나는 그 지역에 살다 지금은 경기 남부로 이사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그곳에 살고 계신다. 간혹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버스를 타곤 한다. 코너를 돌 때마다 스쾃 하듯 하체에 힘을 주거나, 잠깐 눈을 돌린 몇초 사이 배차 간격이 두배 이상 늘어 한숨 쉬는 일은 이제 일상이다. 버스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면 외려 놀랍기까지 하니 나도 주민이 다 되었다.
이쯤 되면 혹자는 이런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럼 지하철 타면 되잖아. 택시 타거나.
물론 그것도 방법일 테지. 이 지역에도 지하철 노선과 택시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관내 지하철역의 간격은 굉장히 넓고, 노선이 제한적이다. 지하철이 주거지와 산업 단지 쪽으로 이어지지 않고 주로 서울 방면으로 향하기에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는 주민들에게는 영 편치 않다. 그리고 택시는…… 참으로 난폭하다. 버스보다도 더. 이런 이유로 이 지역 주민들의 주된 교통수단은 버스다. 혹은 자가용이거나. 그래서일까. 운전면허 학원은 불경기나 팬데믹 같은 악재에도 늘 붐빈다.
학부 시절, 나는 서울에서 지내며 장거리 통학을 했다. 학교는 경기도였으나 동경심 때문에 구태여 서울에 살았다. 유년기부터 몸 붙였던 지역은 버스가 한시간에 한대 서는 벽촌 혹은 앞서 말했듯 손을 흔들지 않으면 버스가 서지 않는 소도시였다. 소도시라 불려도 시내냐 시외냐에 따라 펼쳐지는 풍경이 다르기에 내가 줄곧 봐온 것은 비닐하우스와 곤포 사일리지(그렇다. 당신이 성묘 갈 때마다 본, 논에 있는 거대한 마시멜로), 축사와 낮고 오래된 연립주택,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읍내의 풍경뿐이었다.
지방 출신 친구들이 모이면 엇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도 서로 오묘한 경쟁 심리가 발동해 “너네 동네에 버거킹 있느냐, 크리스피 도넛은? 올리브영은? 씨지브이(CGV)는?” 하며 맞붙곤 하는데, 그 기싸움에서 나는 항상 졌다. 내가 살던 곳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엔 롯데리아와 던킨이 전부였다. 뷰티 스토어나 극장도 존재하긴 했다. 화장품 매장이라기보다는 어머니들의 뜨개방으로 더 성황이던 로제화장품,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헐린 중앙극장이.
상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발전도, 시간도 더딘 동네에서 인생의 절반도 넘게 살았으니 서울에 대한 선망은 어쩌면 자연스러웠을지 모른다. 뭇 지방 아이들이 그러하듯.
하나 예상치 못하게 서울에 와 가장 이채로웠던 건, 버거킹도, 씨지브이도 아닌 버스에 탑승할 때마다 인사를 건네는 기사님이었다.
오를 때는 안녕하세요, 내릴 때는 감사합니다.
물론 내가 살던 지역의 기사님들도 인사를 하긴 했다. 마주 오는 버스 기사에게 ‘여어~~’ 하는 손 인사를. (한갓 승객은 인사를 받을 수도, 할 수도 없다. 일례로 이 지역 토박이인 내 친구는 기사님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가 ‘너 나 알아?’라는 답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보다 더 이색적이었던 건 버스 탈 때 손을 들지 않아도 되며, 배차 간격이 일정하다는 것이었다. 정류장에 아무도 없어도 버스가 선다고? 기사님이 이렇게 친절하다고? 좀체 적응되지 않았다.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혜택을 누리는 것 같았달까.
지방에서 승차를 위해 손을 흔들 때마다 나는 곧잘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 행위가 누군가에게 애걸하는 손짓 같기도, 권리를 주장하는 호소 같기도 해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개인의 호의를 요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울에서는 그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버스와 지하철은 정해진 시간에 오고, 택시는 앱으로 손쉽게 예약 가능했다. 내가 살던 지역에도 카카오택시가 있었으나, 쉬이 잡히지 않아 콜택시를 부르거나 길가에 서서 잡는 게 더 빨랐으니까.
나는 오지 않는 버스 때문에 더 이상 체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저 기꺼워하며 그 혜택을 누리기에 바빴던 것 같다. 다시 지방으로 이주할 줄 모른 채.
누군가를 만나 안면을 틀 때 자연스레 주고받는 질문 중 하나는 ‘어디 사세요?’ 아닐까. 나도 그 질문을 자주 하고, 받는다. 경기 남부에 산다고 말하면 대다수가 ‘멀리 사시네요’, ‘집 가기 힘드시겠다’, 공감조의 답을 해준다. 개중엔 이렇게 묻는 이들도 있다.
“왜 서울에 안 사세요?”
출판사나 행사지, 문화 공간 대부분이 서울에 몰려 있으니 이들의 궁금증이 십분 이해된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집값이 너무 비싸서요.”
나는 서울에서 총 5년 동안 살았다. 3년은 대학로에, 2년은 사당에 머물렀는데 종로에 살 때는 마로니에 공원과 창경궁이 주 산책로였고, 사당에 살 때는 집에서 5분만 걸으면 미술관이 있었다.
윤기 나는 삶의 중심엔 서울에 있었다. 좋은 학교, 많은 일자리, 빠른 정보, 다양한 문화. 그러한 호의호식이 지방인에겐 참으로 달가워 이 삶이 앞으로도 줄곧 이어질 것이며, 죽 서울에 정착할 거라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서울 월세가 나날이 높아질 줄은 모른 채.
독립한 뒤 ‘직방’과 ‘피터팬’에서 매물을 수백개는 넘게 보았다. 오피스텔, 구축 빌라뿐 아니라 반지하와 옥탑까지 월세를 견주고 보증금을 비교했다. 발품 팔아가며 온갖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이로써 깨달은 것은 서울 부동산에도 암묵적인 조례가 있다는 것이었다.
1. 집 볼 때는 사진만 믿지 말고 무조건 현장에 나가 매물 확인하기
2. 중개사에게 ‘너무 비싼데요’ 따위의 말 절대 하지 않기
3. 괜찮은 매물이 하루 만에 빠져도 원래 그렇지 허허하며 쿨하게 넘기기
4. 월세는 값싸지만, 관리비가 그 다섯배에 달하는 허위 매물을 만났을 때도 당황하지 말고 털고 일어나기
이 수칙을 지켜도 적당한 가격의 집은 구할 수 없었다. 서울 집값은 마치 손을 힘껏 흔들어도 멈추지 않는 버스와 같아 궁핍한 사회 초년생 곁을 빠르게 지나갔다. “여기 살아도 돼요?” 물으면 서울이 “감히?” 하며 욕을 뇌까리는 것 같았다. 의식주 중 가장 주(主)가 되는 것이 주(住)일 텐데, 서울에서는 그조차 어려웠다.
손 흔들어도 멈추지 않는 게 비단 시내버스나 서울 집값뿐일까. 간혹 서울 밖에 사는 이들은 ‘나 여기 있어’ 하고 존재를 표하거나 구호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손을 힘껏 흔들어도 이곳의 문제는 잘 가닿지 않는다.
4년 전, 내가 예술 강사로 일했던 초등학교는 지난해 말 폐교되었다. 그때도 신입생이 없어 1학년 교실이 공실이었는데, 폐교 소식을 접하곤 착잡해졌다. 그 소식을 담은 기사는 아주 작게 실렸다. ‘전남, 충남 각 12곳 초등학교 폐교’ 정도로 뭉뚱그려져서.
내가 살던 지역은 전국 시도 중 유일하게 국립 의대와 부속병원이 모두 없다. 공중보건의가 급감해 보건소가 문을 닫고, 응급 의학 전문의가 줄어 응급실이 24시간 운영되지 않는다. 꽤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오던 문제다.
이곳엔 ‘당연’한 것은 없지만, ‘예외’는 존재한다. 그 예외가 누적되면 생활이 되고, 종내 수칙으로 굳는다. 자연스럽게.
인구가 적으니 별수 있나. 예산이 없는데 어쩔 수 없지.
그렇게 굳어가는 동안 누군가는 치료받지 못하고, 누군가는 교육을 포기하며 또 누군가는 체념하듯 이곳을 떠난다.
손 흔드는 일은 피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피로감 때문에 손을 내리면 이곳의 문제는 금세 묻히고 잊힌다.
몇해 전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뿌리는 늘 한국이라는 사회로 뻗어 있고,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고 싶다는 바람이 크다. 허튼 곳으로 향하지 않고, 잘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통증이 어디서 기인되었는지, 문화나 문명이 우리를 어떻게 덮어왔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농촌이나 세시 풍속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일종의 역행이다. 심훈의 ‘상록수’를 좋아하는데, ‘상록수’에 나오는 브나로드운동처럼 도시가 아닌 지방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아 점점 지평을 넓히려 한다. 계몽적 측면이라기보다는 내 나름의 문학 운동이다.”
이 말이 상당한 부채로 남아 농촌을 배경으로 둔 ‘당춘’과 지방의 영화관을 소재로 한 ‘화양극장’을 썼다. 이 작품들을 쓰는 동안 몇몇 지방인과 만났다. 지방의 문제를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나와 달리 그들은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구멍을 차차 메워가고 있었다. 청년 공유 공간을 구축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지방에 청년을 유입하거나, 폐교와 빈집을 마을 쉼터나 게스트 하우스로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는 식으로. 그들 나름대로 손을 흔드는 것이다. 하차가 아닌 안전한 승차를 위해.
오늘도 손 흔드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 우리 삶이 ‘전남, 충남 각 12곳’ 따위의 두루뭉술한 단문으로 묶여 사라지지 않도록 힘껏. 나 역시 이곳을 기록함으로써 그들과 동행하고 있다. 손 흔드는 팔이 무거워진 만큼 이곳에서의 삶이 타협이나 체념이 아닌 기록과 낙관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성해나 작가
성해나
l 2019년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혼모노’로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과 젋은작가상, 2025년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로 젋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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