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자의 목소리
부쩍 노안이 심해져서 세상을 보는 눈이 희미해지고 불편하게 느껴지면서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보고 어떻게 봐야 할지, 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다가 AI에게 사람의 눈이 두 개인 이유를 물었습니다. AI는 뭇 종교의 성현들과 역사 속 철학자들, 지식인들의 말에 의학적 소견까지 망라하여 장문의 답을 줍니다. 과학적으로는 ‘입체감’과 ‘거리감’을 균형 있게 하기 위해서이고, 동서양 성현들과 사상가들은 ‘안과 밖, 나와 타인, 물질과 진리, 지혜와 자비 등 삶의 양면성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편견 없이 보라.’는 의미로 눈이 두 개라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나 *튜브 등의 매체에서는 선거 끝이어서인지 세상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목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같이 자신이 아는 것이 최고라는 듯 누군가를 그리고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비난합니다. 돌아보면 문제의식이 있고,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이 지식인이고 의식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던 젊은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판하는 목소리에 더 열광했었고, 그것이 젊음의 특권이고 상징이며, 세상을 좋게 만드는 일이라고 굳게 믿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도 있는 그대로 듣기보다는 잘못된 것을 찾기에 바쁘고, 비판할 내용이 없는지만 생각하다가 정작 그 사람의 본의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비판하고 부정적인 말로 가득한 마음은 굳어져 수도인에게 가장 바탕이 되는 도심(道心)이 상하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신문을 보며 시사에 대해 가부 평론하며 의견이 분분함을 보신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남의 일에 함부로 말하는 행동을 크게 주의하라 하셨습니다. 날카로운 소견과 가볍게 상대의 시비를 평론하는 사람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다고 하시며, 참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남의 시비를 가볍게 말하지 않고, 신문을 보더라도 그 가운데에서 선악의 원인과 그 결과만을 자상히 살펴서 각자의 앞길에 거울을 삼는 것이 바른 행동이며, 참된 공부인의 자세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 상태는 얼굴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관상도 심상에 따라 변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성현, 철학자들이 눈이 두 개인 이유가 한 편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잡기 위함이라고 하셨듯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는 마음은 건강한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을 준 이유를 원불교에서는 한쪽 눈으로는 안으로 조용히 자기 마음을 보라는 뜻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밖으로 은혜를 발견하라는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흐름 속에 힘을 써서 보려 해도 자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늙음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을 더는 방법이며, 잘 본다는 것은 좋은 것만 봐도 부족한 시간에 굳이 세상의 부정적인 것만 애써 찾을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진리 앞에 겸허한 자세로 밖으로 향하던 눈을 내면의 참마음을 비추는 데 돌리고, 다사다난한 일들 속에서도 은혜를 발견하는 지혜로운 눈을 갖는 것이야말로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비결이 아닐까요?
김수련 원불교 청주 상당교당 주임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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