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8월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일반인 출연자의 권리를 말하다’(한국여성민우회 주최) 현장. 사진=윤유경 기자.
사례1. “가장 자극적인 말들만 방송에 송출됐다. 대놓고 욕 먹으라는 듯이 섬네일을 만들고 유튜브에 탑재해 댓글에 수없이 많은 욕이 달려 삭제 요청을 했으나 섬네일만 교체해줬다.”
사례2. “‘○○녀’로 프레이밍돼 얼굴과 실명이 나온 사진이 박제돼 여기저기 떠돌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성적 욕설을 포함한 온갖 비난, 모욕이 쏟아지는 것을 봤다.”
사례3. “유튜브 링크 안에서만 악플이 도는 게 아니고 외부로도 퍼지고 있는 걸 보고 심각하구나 생각했다. 지역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다. 지역에서 동네에서 활동을 못 할 수도 있을 만큼, 위협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유포가 되고 있다고 느꼈다.”
방송에 나오는 일반인 출연자들에 대한 공격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2016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출연계약서의 불공정 약관을 시정했고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는 대중문화예술인 방송 출연 표준계약서를 12년 만에 전면 개정·고시했으나, 현재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작 흐름을 보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출연자의 피해를 더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동시에 정작 피해를 책임질 주체는 모호하게 만들었다.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일반인 출연자의 권리를 말하다’(한국여성민우회 주최)에서는 일반인 출연자가 출연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방송 후 온라인에서 콘텐츠가 유통되는 제작 과정까지의 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권리 보장의 공백 문제가 논의됐다. 이날 발표를 맡은 허은하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반차별팀 활동가는 방송 출연으로 피해를 경험한 일반인 사례자를 모집해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례자들 중에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 발언이 어디에 공개되고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충분히 설명받지 못한 경우가 다수였다. 제작진과 출연자 사이 권력 관계로 인해 출연자가 성희롱이나 모욕적 발언을 들어도 제대로 문제제기를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사례자들은 공통적으로 방송 이후 콘텐츠가 다른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고 말했다. 방송사에 조치를 요청했지만 미비했고 본인이 직접 게시물을 신고하거나 법적 대응을 이어가야 했다. 한 사례자는 “일반인 출연자에 대한 공격이 온라인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범주로 잘 인정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 2026년 8월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일반인 출연자의 권리를 말하다’(한국여성민우회 주최) 현장. 사회를 맡은 최희연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왼쪽)와 허은하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반차별팀 활동가. 사진=윤유경 기자.
허 활동가는 지상파 방송사(KBS, SBS, MBC, EBS)와 종편·OTT 제작사까지 총 16곳에 공문을 발송해 일반인 출연자에 대한 피해 방지 지침과 출연자 보호 제도의 구체적 내용을 물었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사 중에는 KBS와 EBS만 회신했다. KBS는 2020년 개정된 ‘KBS 방송 제작 가이드라인’을 안내했는데, 모든 출연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하고 프로그램의 성격과 출연 형태·편집 가능성을 사전에 알려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EBS의 경우 문체부의 표준계약서를 준수하고 있다고 답했으나 일반인 출연자를 전제로 작성된 계약서는 아니었다. OTT와 플랫폼의 답변도 제각각이었다. 넷플릭스코리아는 답이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했고, 구글코리아는 커뮤니티 가이드라인과 신고 절차를 알렸다가 본사 법률지원팀의 이메일을 안내했으나 회신은 오지 않았다.
허 활동가는 “정부 공공기관은 출연자를 보호할 수 있는 기준과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피해가 발생했을 때 출연자가 어디에 연락하고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있는 지원체계가 필요하다”며 “방송사와 제작사, 플랫폼도 피해 대응을 출연자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방송 후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예방하고 대응하는 역할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일반인 출연자에게 필요한 것은 출연 전부터 방송 이후까지 작동하는 권리 보장 체계”라고 강조했다.
2022년 가족들과 함께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온라인 공격 피해를 당한 박효정씨도 이날 화상으로 직접 본인의 경험을 공유했다. 박씨는 “방송은 끝났지만 출연자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그 삶을 지켜주는 제도는 너무나 부족했다”며 “방송에 출연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만큼 방송 이후에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일반인 출연자 보호”라고 강조했다.
▲ 2026년 8월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일반인 출연자의 권리를 말하다’(한국여성민우회 주최) 현장. 2022년 가족들과 함께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온라인 공격 피해를 당한 박효정씨도 이날 화상으로 직접 본인의 경험을 공유했다. (박씨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 사진=윤유경 기자.
일반인 출연자를 소재로 삼는 자극적 언론보도도 문제다. 박씨는 “사건 발생 후 언론은 기본적 사실관계 확인 없이 앞다투어 자극적 제목의 기사를 경쟁하듯 생산해냈다. 언론은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악한 악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 기사를 그대로 믿으며 가족을 마음껏 욕하고 비웃는 댓글을 작성했다”며 “일반인 출연자의 특성을 고려한 언론의 자율적인 보도 기준과 책임 있는 보도 원칙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피해는 커지고 책임은 사라진 미디어 환경
해외에서도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일반인 출연자 보호는 지속적으로 지적된 문제다. 영국에서는 시청자들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방송통신규제기관 오프콤(Ofcom)이 2020년 TV와 라디오의 일반인 출연자 보호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오프콤은 방송 출연자들을 ‘취약한 사람들’(vulnerable people)이라고 규정했다. 출연자들이 프로그램에 출연함으로써 잠재적 위험에 노출될 수 있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오프콤은 출연자들이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며 프로그램이 인공적 환경에서 촬영되는 점도 짚었다. 이러한 특징이 언론이나 소셜 미디어의 관심을 끌 가능성이 높고, 이를 제작에 고려해야 한다는 당부다.
오프콤은 방송 전·방송 중·방송 후 세 부분으로 나눠 규정을 만들었다. 방송 전에는 방송제작의 위험 요소를 평가하고 출연자가 방송 촬영에 적합한지 전문가 의견을 구한 뒤 정신건강 개선을 위한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방송 중에는 출연진 소통을 담당하는 단일한 연락처를 공유하고, 필요하다면 방송 촬영 도중 출연진을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했다. 방송 제작 후에는 출연자와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고, 심리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SNS 사용 자제를 제안하거나 방송 송출 전 출연자에게 출연 관련 정보를 전달하도록 했다.
▲ 2026년 8월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일반인 출연자의 권리를 말하다’(한국여성민우회 주최) 현장. 이종임 경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강사(왼쪽)와 홍남희 연세대 매체와예술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사진=윤유경 기자.
미국의 경우엔 일반인 출연자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출연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2023년 리얼리티 쇼 ‘The Real Housewives of New York City’ 출연자는 출연자들의 출연료와 제작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학대 등의 문제를 막기 위해 파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 중 제작진의 과도한 음주 권유와 성적인 피해 문제가 발생하며 비판이 커지자 리얼리티 쇼 출연자 보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제작진과 출연진 대상 알코올 교육을 실시하고, 모든 리얼리티 출연진들을 대상으로 출연 전후로 심리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다만 미국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수에 비해 일반인 출연자 보호 제도 마련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이종임 경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강사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 환경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계약은 외주 제작사와 한 것이고 방송사는 편성만 한다’는 식으로 흐름이 바뀌면서 2016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며 “공정거래위원회든 문체부든 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해외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플랫폼에 콘텐츠를 올리는 것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며 “이제는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것 아닌가’라고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제작진의 책임을 더 명확히 하고, 오프콤에서 제안했던 부분들을 국내에도 반영해 방송사 가이드라인에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남희 연세대 매체와예술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역시 “지금 미디어 환경은 책임이 사라지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방송사가 일반인 출연진을 적은 출연료로 섭외해 방송을 쉽게 만드는 시장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가정에서 분출되는 정서적 에너지와 갈등의 요소를 날 것 그대로 방송해 콘텐츠 IP로 활용하면서, 정당한 지불은 하지 않고 있다”며 “육아, 이혼 등 보편적이지만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방송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출연한 취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출연자의 자발성이나 동의, 계약 여부가 모욕과 피해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되는데, 제작진과 일반인 출연진 간에는 권력의 비대칭이 전제돼있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동의의 관계가 해석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가장 많은 피해는 재유통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다. 어디로 퍼져나가는지도 모르는 채 퍼지고,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다”며 “콘텐츠 IP라는 개념으로 방송사의 책임을 더 강조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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