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호 과학전문기자·논설위원
서울 홍릉 회기로는 과거와 현재·미래가 뒤엉킨 듯한 공간이다. 흔적만 남은 와인 샵 간판, 페인트가 벗겨지고 비어버린 상가, 차량이 들어서지도 못할 주택가 골목…. 하지만 왕복 5차선 도로 맞은편으론 국방연구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산림과학원·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첨단 국가 연구소들이 나란히 서 있다.
한때 명성황후의 능이 있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홍릉. 고종 승하 후 능은 남양주 금곡으로 옮겨갔지만, 한 세월이 흐른 뒤 이곳은 과학입국의 성지로 재탄생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한민국 최초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KIST가 들어서면서부터다. 그때만 해도 홍릉은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중공업을 일으킨 포항제철 설립의 구상도, 미사일 등 자주국방 무기들을 개발한 국방과학연구소(ADD)도 여기서 출발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삼성·현대·SK 같은 기업들이 글로벌 거인으로 성장하며 자체 연구소를 세우고 인재를 흡수했다. 그사이 정부 연구소들은 대전 등지로 하나둘 떠났다. 남은 연구소의 역할은 예전만 못했고, 주변 상권은 노후화됐다. 대한민국 성장의 엔진이었던 홍릉은 그렇게 도시의 섬처럼 고립되며 늙어갔다.
정부 1월 발표 주택공급 방안에
KIST 등 홍릉 일대 대거 포함돼
5000억대 로열티 큐어버스 등
과학입국 성지 부활 싹 자를 판
옛 농촌경제연구원 자리에 들어선 서울바이오허브. 최준호 기자
홍릉 연구부지에 웬 아파트
세월 속에 외면받아온 홍릉이 최근 갑자기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지난 1월 말 정부의 수도권 주택공급 방안 발표 때문이었다. 국토교통부와 재정경제부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공개한 ‘도심 주택공급 확대 및 신속화 방안’에 홍릉 국방연구원(KIDA)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세종시로 이전한 뒤 들어선 글로벌지식협력단지 자리에 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애초 계획엔 지방 이전을 전제로 KIST 부지까지 포함됐다가 과학계의 격렬한 반발로 취소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주택공급 실적이라는 성적표가 급한 중앙정부의 눈에는, 반세기 넘게 지켜온 국가 연구소들의 부지가 그저 아파트를 올리기 쉬운 노는 땅으로 보였을 터다. 굳이 주택공급 방안이 아니어도 글로벌지식협력단지는 그간 부처 이기주의의 대표적 사례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연구소나 기술이전 또는 벤처기업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땅주인인 재정경제부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최근에는 홍릉강소연구개발특구사업단이 입주를 협의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홍릉밸리 외곽인 하월곡동으로 가야만 했다. 옛 KDI 건물은 지금 전시관과 도서관·카페·연수시설 등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결국은 아파트촌으로 전락할 신세가 됐다. 힘센 경제부처의 몽니가 낳은 망국적 서사다.
아파트 건설 부지로 발표난 KDI 부지. 최준호 기자
지역 혁신생태계와 지자체는 중앙정부의 일방적 발표에 반발하고 있다. 국방연구원은 연구원 이전을 반대하면서 테스크포스(TF)까지 만들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동대문구는 “홍릉 개발은 단순한 주택 공급 확대를 넘어 홍릉강소연구개발특구와 연결해 구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 4월에는 ‘홍릉 일대 지역거점 발전전략 구상 용역’을 착수하면서 홍릉 일대를 연구개발과 주거 기능이 조화를 이루는 복합공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을 구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모두가 지난 1월 중앙정부의 주택공급 정책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수포가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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