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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최석원 칼럼] '성공한 나라'를 지속하기 위한 조건

BTS·반도체의 성공 신화에도 느껴지는 괴리감 그런데 다음날 일상으로 돌아와 칼럼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자 혼란스러워졌다. BTS의 성공은 무엇을 의미할까? 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산업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석원 칼럼] '성공한 나라'를 지속하기 위한 조건

[최석원 이코노미스트] 지난 3월 21일 저녁 광화문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모였다. 거대한 스크린이 번쩍이고, 전 세계에서 날아온 ‘아미’들의 보라색 응원봉이 BTS의 노래와 춤에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사실 지금 전 세계 뉴스는 미국-이란 전쟁으로 도배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나라 수도 한 복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노래하고 열광했다. 예상에 미치지 못한 인파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도심에서 이 정도 규모의 콘서트를 안전하게 치러내고, 전쟁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은 일종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평소 아이돌 음악에 큰 관심이 없지만, 필자도 집에서 넷플릭스로 생중계된 공연을 봤다. 경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글로벌 플랫폼이 이번 행사 수익의 상당 부분을 가져갈 것이라는 점은 어딘가 불편했지만, 그래도 K-Pop 공연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며 중계 수익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우리가 이 분야에서 쌓아온 성취가 상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 보니 화면 속 BTS뿐 아니라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성과,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 일본을 넘어선 1인당 국민소득 등 성과도 떠올랐다. 이제 우리나라는 K-Pop의 경쟁력을 넘어 다른 지표들을 보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BTS·반도체의 성공 신화에도 느껴지는 괴리감

그런데 다음날 일상으로 돌아와 칼럼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자 혼란스러워졌다. BTS의 성공은 무엇을 의미할까? 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산업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한가? 좋은 쪽만 보면 희망에 찬 뉴스가 가득한 것 같은데, 왜 잠재성장률은 떨어지고, 사람들의 체감은 나아지지 않는가? BTS 뉴스에 대한 댓글은 왜 이렇게 분열되어 있나? 과연 우리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가?

사실 기본적인 지표만 보면 우리는 이미 세계 상위권 국가다. 비록 우리 증시는 아직 선진국 증시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글로벌 주요 기관들은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정하고 통계를 작성하고 있고, 채권시장은 이미 선진국 시장에 편입됐다. 또한 앞서 얘기한 주요 산업의 경쟁력은 세계적이다. 내부적으로 보더라도 치안이 안정적이고, 재정은 비교적 건전한 편이다. 의료와 교육 인프라 역시 우수하고, 학업 성취도는 OECD 상위권이다. 그래서 국가신용등급은 선진국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문화와 관광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K-Pop도 있지만, 영화, 드라마, 게임, 웹툰은 이미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고, 뉴스를 보면 한국은 많은 이들에게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나라’가 된 것 같다. 이 정도의 산업과 문화, 브랜드를 동시에 갖춘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분명 성공한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래다. 우리 잠재성장률은 2000년대 초반 5% 수준에서 최근 1%대 후반으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2030년대에는 1% 초반, 이후에는 0%대에 근접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노동력과 소비 기반이 동시에 줄어드는 가운데, 생산성과 혁신이 이를 충분히 보완하지 못하고 있고, 인구 구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전망은 조만간 빠른 성장이 문제가 아니라, 과연 성장할 수는 있는가 여부로 우리 고민이 바뀔 것임을 의미한다.

청년들의 현실은 더 나쁘다. 청년 인구는 기존 베이비부머보다 크게 줄었지만, 고용 상황은 그 당시보다 훨씬 열악하다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청년 실업률은 7%를 넘나들며 전체 실업률 3%대의 두배에 달하고, 첫 직장을 얻는 시점은 늦어지고 있으며, 일자리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이처럼 안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선택이 줄어들고, 선택이 줄어드니 당연히 삶의 만족은 내려가고 있다. 실제로 최근 OECD가 발표한 삶의 질 지표에서 우리나라 청년의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평균 6.5점 수준으로, 38개 회원국 중 30위권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이어진다면 앞으로의 모습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성장률이 점차 낮아지면서, 고용은 양극화될 가능성이 크고, 안정적인 중간층 일자리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AI의 등장은 지금 있는 일자리조차 감소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경제성장은 유지되더라도, 그 성과가 고르게 확산되지 않는 구조는 더 강화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절대적인 삶의 질 문제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청년층을 넘어 전체 국민으로 확대하면 지금의 상황을 단순히 삶이 나빠졌다고만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볼 때 한국인의 생활 수준은 분명히 개선되어 왔다. 교육, 의료, 치안, 인프라 등 기본적인 환경의 수준은 계속 높아져 왔다.

하지만, 만족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모습이다. 절대적 삶이 나아진 사람들조차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절대적인 개선이 만족으로 이어졌던 반면, 지금은 상대적인 위치와 미래에 대한 기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비교의 범위가 넓어지고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서 같은 성과도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비교 범위가 넓어지고 기대가 커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후 과정을 보면 좀 의아하다. 경쟁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성과가 다음 기회로 이어져야 하는데, 어느 순간 경쟁의 성과가 잘 확산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는 누군가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성공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더 나은 시도를 촉발한다. 예를 들어 작은 빵집을 운영하더라도 최고의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경쟁력을 만들고, 그것이 안정적인 수익과 자부심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관광 기념품 하나를 만들더라도 반드시 사고 싶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연결이 약해지고 있다. 나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품질이 낮지만 비싼 음식을 제공하고, 별로 사고 싶지 않은 기념품이 수두룩하며, 많은 서비스의 품질도 좋지 않다. 타인의 성공이 기준이 되면 누구나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려 노력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타인의 성공이 내 발전의 동력이 되지 않고 비교의 대상으로만 보거나 타인의 부는 비도덕적 방식에 의한 것이라는 집합적 인식 등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겠지만, 현재의 구조에서는 성과를 낸 이후의 부담이 빠르게 커지는 환경도 영향을 준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이 성장하면 규제와 책임이 늘어나고, 개인이 성과를 내면 더 큰 부담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 세제도 그렇지만, 문화적으로도 그러한 환경을 만든다. 즉, 개인 입장에서 보면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공은 보상의 확대로 인식되기 보다는 부담의 증가로 인식된다는 얘기다.

지난 21일에 열린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서울 광화문 컴백 공연은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 190여개국에 생중계되는 등 K-Pop의 글로벌 위상을 확인해주는 이벤트였다. 사진=연합뉴스

성공이 부담의 증가로만 이어져선 안돼

이러한 구조에서는 경쟁이 존재하더라도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기는 것이 다음 기회를 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부담을 의미하는 상황이라면,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는 비율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일부에서 치열한 경쟁이 유지되지만, 성과가 극대화되는 동력은 점점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정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 해결의 방식이 초래할 정치적 불리함을 감수하기보다, 이 상황의 정치적 유리함을 이용하는 선택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장과 고용을 늘릴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정책은 갈등과 비용을 수반하는 반면, 분배와 보호는 상대적으로 즉각적인 지지를 만들어내기 쉽다. 그 결과 경쟁의 기반을 강화하기보다, 경쟁의 결과를 조정하는 정책이 반복됐다. 문제는 그 강도가 높아지면서, 경쟁의 보상 구조 자체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 정치는 경제에는 장기적으로 최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불리한 선택을 계속 회피해 온 셈이다.

그 결과 우리는 묘한 나라에 살고 있다. 세계적인 산업과 문화를 동시에 갖춘 나라, 이미 성공의 기준을 충족한 나라. 그러나 그 성취가 청년의 일자리, 성장의 지속성, 삶의 안정, 그리고 삶의 만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토요일 저녁의 열기와 다음 날 아침의 위화감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감각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뤄냈지만, 그것이 다음 성취로 이어지는 구조가 충분하지 않고, 그 이면에는 결국 국민 스스로의 집합적 선택이 존재한다는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절대적인 삶의 질이 나아져도 행복해지기 어렵다.

따라서 이제 고민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이미 만든 성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도 중요하다. 또한 그런 정책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특정 계층을 죄악시하며 과도할 정도로 실행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성공이 다시 새로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경쟁의 결과가 다음 기회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오지 못한 선택을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나아가 그렇게 바뀌는 것을 과연 행복하다고 느끼긴 할까? 그래서 결국 오랜 기간 계속 ‘진짜’ 성공한 나라로 남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최석원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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