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고령사회 가족 소멸 ‘삶 집행 대행’ 나선 은행들
-KB금융 양종희 요양 인프라·신한 생전 신탁·우리 대면 거점·농협 안심 신탁 등 각축
-금융 소외·자산 격차 여전… “지방 노인·중저소득층엔 여전히 높은 문턱”
가족 소멸 시대에 노인 스스로 자산을 지키고 집행할 수 있도록 돕는 창구의 단면. 그러나 이러한 시니어 특화 서비스가 지방 노인과 중·저소득층의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승후 기자
[뉴스클레임]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은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20년전부터 고령화는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23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1000만 명을 돌파하며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섰다. 인구 구조의 축이 무너지면서 고령층을 둘러싼 금융의 정의도 급변하고 있다. 과거 은퇴 자산을 불리고 관리하던 ‘재테크’ 중심의 기능만으로는 30년이 넘는 긴 노후를 떠받칠 수 없다는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혼자 사는 노인이 213만 가구를 넘어서고 자녀와의 동거 비율이 20% 미만으로 떨어진 현실 속에서, 병원비와 간병비, 요양과 주거 문제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 금융회사가 직접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로 부상했다.
서울 구로구의 한 시중은행 창구, 돋보기안경을 고쳐 쓴 70대 이모 씨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연신 두드리고 있었다. 비대면 앱 화면에 뜬 '6자리 인증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 아래로 제한 시간 3분을 알리는 숫자가 초 단위로 줄어들었다. 세 차례 오류 끝에 화면이 잠기자 이 씨는 마스크를 벗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씨는 "글씨가 너무 작고 복잡해서 조금만 헤매도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다"며 "재산이 든 통장인데 까딱 잘못 눌러 돈이 날아갈까 봐 매달 버스를 타고 창구로 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권이 비용 절감을 이유로 디지털 전환을 서두르는 동안, 고령층의 금융 접근성은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지점장은 "시니어 고객들이 창구를 찾는 이유는 단순 자산 운용이 아니다"라며 "상속, 신탁, 예금 해지처럼 삶의 궤적이 바뀌는 중요 업무에서 인간의 목소리와 대면 확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은행 창구 모습. 김승후 기자
이 같은 고령층의 물리적 고립과 돌봄 공백을 파고든 곳이 KB금융이다. KB금융은 양종희 회장이 이끌고 있다. 양종희 회장이 주축이 돼서 요양과 금융을 결합하는 하드웨어 구축에 가장 적극적이다. 자회사 KB골든라이프케어를 통해 서울 서초·위례·은평·광교 등지에서 대형 요양시설과 데이케어센터를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강원 평창에는 실버타운인 ‘KB평창카운티’를 세웠다.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KB라이프 역삼센터’에는 은행 자산관리 전문가뿐 아니라 보험, 재가 돌봄, 요양시설 입소 상담 인력이 한 공간에 근무한다. 금융 상담을 받던 고객이 그 자리에서 요양원 입소 서류를 검토하는 구조다. KB는 오는 2028년 개원을 목표로 서울 송파구에 대규모 요양시설 건립을 추가로 추진하며 영토를 넓히고 있다.
KB국민은행도 은퇴 자산관리 거점인 ‘KB골든라이프센터’를 기존 서울·수도권 중심의 4곳에서 전국 12곳으로 확충했다. 광주, 대구, 대전, 부산 등 비수도권 거점 도시로 반경을 넓힌 것이 특징이다. 이곳에서는 유언대용신탁과 상속·증여 등 복잡한 법률·세무 상담이 대면으로 이뤄진다. 연금 수령기 고객을 위한 오프라인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인터넷 검색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요양 및 자산 관리 정보를 직접 대면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사후(死後) 자산 배분보다 생전(生前) 자산 통제에 초점을 맞춘 신탁 기능에 집중하고 있다. 기존의 연금라운지를 시니어 특화 공간인 ‘쏠메이트라운지’로 개편하고 종합자산신탁 체계를 대폭 손질했다. 고객이 인지능력이 온전할 때 자산의 용도를 의료비, 돌봄비, 기부, 증여 등으로 미리 세분화해 설계하는 방식이다. 치매나 중증 질환으로 직접 금융 거래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더라도, 미리 약정된 계약에 따라 병원비와 간병비가 통장에서 간병인이나 병원 계좌로 직접 집행되도록 해 자녀 간의 분쟁이나 자산 편취 리스크를 원천 차단하는 구조다.
우리은행은 고령층의 현장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는 실무적 대안을 제시했다. 서울 동소문과 영등포, 화곡동에 문을 연 고령층 전용 ‘시니어플러스’ 영업점은 일반 점포와 풍경이 다르다. 대형 스크린이 장착된 큰 글씨 ATM기가 설치됐고, 창구 턱을 낮춰 휠체어나 지팡이에 의지한 노인들이 편안하게 앉아 상담할 수 있도록 했다. 점포 내부에서는 금융사기 예방과 스마트폰뱅킹 이용법을 알려주는 교육이 상시 진행되며, 복지시설과 연계한 ‘어르신 IT 행복배움터’를 통해 고령층이 금융 생태계에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을 기르도록 돕고 있다.
농협은행은 농촌 지역과 고령층의 질병 국면을 겨냥한 ‘의료비 치매 안심 신탁’을 전면에 내놨다. 이 상품은 치매 확정 판정 시 자산이 동결되거나 타인에게 유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계됐다. 건강할 때 신탁한 자산을 기반으로, 향후 병원비나 간병비 청구서가 접수되면 은행이 이를 검증한 뒤 직접 대금을 지급한다. 여기에 세무 상담, 건강검진 우대권, 상조 서비스 연계 등 노후 후반부에 집중되는 지출 흐름을 패키지로 묶어 노인 가구의 행정적 부담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은행들이 이처럼 요양, 돌봄, 신탁으로 보폭을 넓히는 배경에는 ‘ 가족의 소멸’이라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인구학적 균열이 존재한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아플 때 돌봐줄 동거 가족이 없는 독거노인 비율은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노인 가구의 소득 중 사적 부양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으로 추락했다.
자녀에게 의탁하던 노후는 끝났고, 노인 스스로 병원비와 장기요양 비용을 증빙하고 집행해야 하는 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과거 노인들의 요구는 '예금 금리 0.1%포인트 더 주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요양원에 들어가 누워있을 때 내 돈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낼 것인가'로 바뀌었다"며 "돈의 보관을 넘어 삶의 집행을 대행하는 곳이 되어야 은행도 생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금융권의 화려한 변신이 대다수 보통 고령층의 삶을 구제하고 할 수 없다.
현재 시중은행들이 내놓는 프리미엄 시니어 서비스와 유언대용신탁, 고급 실버타운은 수억 원대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자산가들을 주요 타깃으로 설계돼 있다.
당장 매달 청구되는 병원비와 월세에 쫓기는 중·저소득층 고령자들에게는 문턱이 높다. 또한, 전국의 시중은행 점포 수가 최근 5년간 1000여 개 넘게 사라진 가운데, 시니어 특화 점포나 상담 센터는 여전히 서울 강남과 수도권, 일부 광역시 중심가에 집중되어 있다.
금융 인프라가 완전히 붕괴된 지방 소도시와 농촌 지역의 노인들은 여전히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읍내 지점을 찾아 버스를 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요양과 신탁을 결합하겠다는 은행권의 시도에 거는 기대가 크다. 저변확대를 통해 고령층의 보편적인 삶을 지탱하는 실질적 안전망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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