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지리학(메흐란 굴 지음, 비즈니스북스 펴냄)
中 자국 10억명 중 인재 뽑지만
개방 생태계 美는 80억명이 대상
“혁신, 천재보다 환경적 토양 중요”
대기업이 기술 선도하는 한국서
이민정책으로 AI강국 된 加까지
패권 거머쥔 8개국 비결 파헤쳐
혁신의 지리학. 사진 제공=비즈니스북스
미국 실리콘밸리는 전 세계 혁신 기업의 요람이자 성지와 같은 곳이다. 애플·엔비디아·구글·메타·오픈AI 등 글로벌 기술 혁신을 이끄는 기업들의 본사가 실리콘밸리에 모여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실리콘밸리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중국이다. 중국 기업들은 전기차·배터리·드론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 혁신 기업의 경쟁 상대는 중국만이 아니다. 반도체를 예로 들면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의 TSMC, 영국의 Arm, 네덜란드의 ASML 등이 각자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미국의 기술 패권 시대가 막을 내리고 중국이나 다른 국가가 새로운 혁신의 허브로 떠오를 수 있을까. 신간 ‘혁신의 지리학’은 세계 기술계가 주목하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세계경제포럼(WEF)과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에서 산업 정책 전문가로 활동한 저자는 답을 찾기 위해 글로벌 혁신을 선도하는 8개국의 기술 수준과 잠재력을 낱낱이 파헤친다.
각국의 기업가와 정부 관계자, 투자자 등 200여 명을 직접 취재한 저자의 결론은 명확하다. 실리콘밸리의 독주 체제는 당분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세상은 ‘닷컴(.com)’ 시대에서 ‘닷에이아이(.ai)’ 시대로 이동하고 있고 실리콘밸리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공지능(AI) 기업인 오픈AI, 앤트로픽, 데이터브릭스 모두 샌프란시스코 반경 3㎞ 이내에 위치해 있다. 실리콘밸리의 개방적인 문화와 두터운 인재풀도 중국의 추격을 따돌릴 요소로 꼽았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직원들이 자유롭게 회사를 옮겨 다니며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강력한 기술 조합을 만들어낸다. 또 중국이 자국 내 10억 명 중에서 인재를 뽑는다면 미국은 전 세계 80억 명 중에서 인재를 선발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중국의 위상 역시 달라졌다. 현재 중국은 사실상 미국의 유일한 경쟁자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과거 미국의 기술을 모방하던 중국은 이제 미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에 가장 많은 논문을 기고하는 국가로 올라섰다. 연구 성과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라이덴 랭킹에 따르면 세계 최고 대학 10개 중 6개가 중국 대학이다. 중국의 전기차, 산업용 로봇, 모바일 결제, 태양광 발전 도입 규모는 전 세계 다른 지역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크다. 하지만 중국 기술 기업의 가장 큰 리스크는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다. 2020년 중국 정부가 기업가치를 약 3000억 달러(약 410조 원)로 평가받았던 앤트그룹의 기업공개(IPO)를 무산시킨 게 대표적 사례다.
적극적인 이민 정책으로 AI 강국이 된 캐나다의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오늘날 AI 분야 최고 석학으로 평가받는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 리처드 서턴 앨버타대 교수는 모두 캐나다 이민자 1세대다. 캐나다는 이들 과학자가 속한 대학 인근에 각각 AI 연구소를 설립하고 AI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 기술 기업의 변천사도 3단계로 설명한다. 1단계는 삼성·현대 같은 전통 대기업이고 2단계는 네이버·카카오 등 인터넷 플랫폼 기업이다. 3단계 기술 기업은 쿠팡·크래프톤·센드버드·트웰브랩스·몰로코 등으로 외국 경쟁사 대비 기술 우위를 확보하고 미국과 한국에 모두 진출한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특히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 기업들은 기존 대기업이 파괴적 기술을 앞세운 신생 기업에 밀려 도태된다는 ‘혁신기업의 딜레마’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라고 강조한다. 일제강점기에 작은 무역상으로 시작해 현재 글로벌 반도체·휴대폰 시장을 주도하는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어디에서 창업하느냐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동신 센드버드 대표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괴짜 취급을 받았지만 실리콘밸리에 도착한 순간 소속감을 느끼게 됐다고 말한다. “내가 간 카페마다 벤처캐피털에 열심히 설명하는 스타트업 대표들을 볼 수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마치 내 집을 찾은 것 같았지요.”
책은 혁신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혁신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464쪽, 2만 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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