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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동칼럼]AI 고속도로 아래, 힘겨운 노동자들

국가가 또다시 거대한 고속도로를 닦겠다고 선언했다. 600개가 넘는 공공기관 대표번호를 국민콜 ‘110’ 하나로 묶고 인공지능(AI)을 결합하겠다는 ‘비긴급 상담번호 통합사업’이다.

[정동칼럼]AI 고속도로 아래, 힘겨운 노동자들

국가가 또다시 거대한 고속도로를 닦겠다고 선언했다. 600개가 넘는 공공기관 대표번호를 국민콜 ‘110’ 하나로 묶고 인공지능(AI)을 결합하겠다는 ‘비긴급 상담번호 통합사업’이다. 긴급 전화는 112와 119로, 모든 일상 민원은 110으로 끝내는 디지털 행정 혁신을 이루겠다는 구상이다. 과거 경부고속도로가 산업화를, 초고속 정보고속도로가 IT 강국을 열었듯 이제는 ‘AI 고속도로’를 깔아 국가 대전환을 완성하겠다는 기세다.

그러나 거대한 국가적 어젠다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올 때 시간의 무게는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국가의 지도자는 100년의 미래를 말하고, 기획하는 관료는 30년과 10년의 로드맵을 짠다. 하지만 사다리의 가장 밑바닥, 수화기를 든 말단의 노동자는 ‘오늘 하루’를 본다. 낯선 타 부처의 복잡한 지침을 숙지할 지원 시스템도 없이 15개 기관의 전화가 쏟아져 들어오는 오늘 하루 수백통의 감정노동을 어떻게 맨몸으로 버텨낼 것인가.

사회학자 구해근 교수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통찰했듯 한국의 도약기는 늘 국익과 발전이라는 거대 담론 아래 현장 노동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거름 삼아 진행되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정부는 8월 말 15개 기관 시범운영이 끝나자마자 객관적 평가나 현장 개선 기간도 없이 9월 본통합으로 직행한다. 현장의 일선 상담팀장에게 통합 이후의 변화를 묻자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개선된 것은 전혀 없다. 민원인은 원치 않는 곳에 연결되었다며 화를 내고, 상담사는 영문도 모르는 타 부처 민원을 방어하느라 감정노동만 가중됐다.”

기술의 속도 뒤에는 더 잔인한 노동의 도구화가 도사린다. 사측은 ‘신기술 도입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납작한 이분법으로 노동조합의 입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누구를 위한 혁신이며, 왜 그 혁신의 청구서만 가장 취약한 현장 노동자와 시민에게 일방적으로 청구되는가’이다. 정부는 뒤편에서 12억원 규모의 AI 실증 용역을 발주하면서도 노동조합과의 대화에는 “도입 미확정이라 협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로드맵상 상담사를 실질적으로 돕는 시스템은 2028년에야 도입되며, 그전까지 상담사들은 AI 학습용 데이터를 채우는 도구로 전락한다.

과학기술학자 실라 재서노프는 국가가 기술을 매개로 그리는 유토피아적 미래상을 ‘사회기술적 상상’이라 불렀다. 국가는 기술 자본의 장밋빛 서사를 수입해 AI를 절대적 목표로 물신화하지만, 이 상상이 하향식으로 밀고 내려올 때 현장의 물질적 현실은 지워야 할 비효율로 취급된다.

그러나 공공 민원상담은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는 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복지 혜택을 몰라 헤매는 노인, 행정 절차에 막막해하는 청년,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민의 거친 언어 뒤에 숨은 맥락을 읽어내어 행정과 연결해주는 고도의 ‘해석 노동’이자 ‘돌봄 노동’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술관료들의 매끄러운 조감도가 현장의 오랜 숙련과 암묵적 지혜를 지워버릴 때, 시스템은 오작동하고 그 구멍은 결국 말단 노동자의 몫으로 남는다. 시스템의 오류와 핑퐁 행정이 빚어낸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것은 결국 노동자의 몫이다.

실제로 서울시 120다산콜센터의 선행 사례에서 보듯 AI 도입은 인력 감축과 함께 고령층이나 장애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의 상담 접근성 공백을 우려케 했다. 110 콜센터 역시 수어 상담사나 취약계층 응대 대책은 정보화 기획 단계에서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채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이전 상담 내용이 연계되지 않아 시민은 같은 설명을 몇번씩 반복해야 하고, 부처들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며 전화를 돌린다. 결국 현장 노동자의 배제와 기술 만능주의는 공공서비스의 질적 저하와 시민의 피해로 고스란히 귀결된다.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것은 기술의 거부가 아니라 사람과 시스템이 함께 준비된 ‘안전하고 책임 있는 공공서비스’의 도입이다. 이를 위해 국무총리실 등 범정부 차원의 ‘공공부문 AI 검증위원회’와 같은 사회적 검증 기구를 통해 기관별 중복 투자를 방지하고, AI 오답 시 책임 소재 규정, 민원 데이터 활용 윤리, 디지털 취약계층 접근권 보장, 인력 전환 및 재교육 로드맵을 선제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AI 대통합의 성패는 현란한 기술 수사나 아키텍처에 있지 않다. 수화기 너머에서 하루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그 한 사람의 노동을 바라보는 데 있다. 사람이 빠진 고속도로 끝에 국민을 위한 국가는 없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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