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길어질수록 자유는 잃어가고
우리, 공존, 인간 존엄은 멀어진다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는 이렇게 시작된다. ‘자유’는 엘뤼아르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며 발표했다고 한다. 이 시는 가장 순수하고 어린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로 시작하여, 무려 20연에 걸쳐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1942년에는 영국의 항공대가 독일군 점령 아래 있는 프랑스 지역에 이 시를 뿌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전쟁이 지구촌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명분이 무엇이든 정당한 전쟁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은 인간 생명의 존엄을 땅바닥에 메다꽂는 가장 나쁜 범죄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란 남부 미나브의 초등학교에 폭탄이 터져 175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굴착기가 무수한 구덩이를 파고 있는 항공사진은 실제 같지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 그래서 더욱 마음을 저리게 한다.
먼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전쟁은 우리가 사는 지구촌을 하루아침에 조폭들이 지배하는 마을로 만들었다. 조폭들을 향해 누구도 쉽사리 눈을 치뜨거나 고개를 들고 저항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각자도생’의 벼랑으로 내몰린다. 저마다 알아서 살아나갈 방법을 꾀하는 것이다. 제일 먼저 약자들이 먹이가 되고 희생양이 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은 저 악당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를 걱정해야 하는 일상이 펼쳐진다.
“황금빛 동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폭군들의 검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 황금으로 덧칠한 동상과 병사들의 총칼은 ‘자유’를 억압하며 ‘왕관’을 지켜줄 뿐이다. 시민들의 온전한 삶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전쟁은 각자의 생존에 몰입하게 만들어 ‘우리’와 ‘공존’을 바라볼 수 없게 한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유가 상승과 주가 폭락에 눈이 머물러, 사람 목숨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은 점점 희미해진다. 우리는 이렇게 ‘자유’를 잃어간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엘뤼아르는 ‘자유’를 이렇게 새겼다. 안식처와 등댓불을 빼앗긴 지금은, 전쟁을 일으킨 자의 입에서 나올 다음 수가 무엇인지를 알아맞히는 게임 같은 보도만 넘치는 현실이다. 인공지능(AI)이 인간 존엄의 목을 조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기심의 철조망이 쳐진다. 엘뤼아르의 시 ‘자유’는 이렇게 끝난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김지하 시인은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을 떠올리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고 했다. 김남주 시인은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라고 썼다.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라고 위선을 꾸짖었다. 내로남불의 ‘독선’을 자유라고 외치며 시민들을 ‘계몽’하고자 했던 ‘황금빛 동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응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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