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자산
18세기 말 북경을 통해 전래된 천주교는 서학(西學)의 형태로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전라도에서는 양반과 중인층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고, 진산 사건(1791년)을 계기로 전주 일대는 조선 조정이 주목하는 ‘이단 확산 지역’으로 지목됐다. 특히 전주와 완주, 익산 일대는 초기 교우촌이 밀집했던 곳이다. 신자들은 관의 감시를 피해 산간과 농촌에 공동체를 이루며 신앙을 유지했고, 이는 이후 대규모 박해 때 집단 검거로 이어지는 구조적 요인이 됐다. 편집자
전주전동성당
전주전동성당
전주한옥마을 입구, 관광객들이 셀카를 찍으며 지나치는 전동성당은 사실 한국 천주교 박해사의 ‘핵심 현장’이다. 화려한 로마네스크·비잔틴 양식의 벽돌은 전주성 성벽을 허물어 빚은 흙과 돌로 지어졌고, 그 아래에는 피 흘리며 목이 떨어져 나간 순교자들의 기억이 잠들어 있다. 오늘의 전주 풍경 한가운데, ‘종교 자유’가 없던 시대의 비명과 질문이 겹겹이 켜켜이 쌓여 있는 셈이다.
-신주를 불태운 양반
1791년, 전라도 진산군 장고치(현 충청남도 금산군벌곡면 도산리)에 살던 양반 윤지충은 어머니 제사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유교적 질서에서는 당연한 제사지만, 그가 접한 새로운 종교 ‘천주교’는 조상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 장례를 치르는 길을 택한다.
같은 신앙을 가진 외사촌 권상연이 윤지충 편에 서면서 이 사건은 마을의 풍문을 넘어 조정의 문제로 비화했다. “사대부가 제사를 끊었다”는 소식은 ‘지배질서 도전’으로 해석됐고, 정조는 전라감사에게 조사 명을 내렸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끝내 체포돼 전주로 압송되고, 전라감영의 심문에서 윤지충은 “천주께 죄를 짓느니 사대부에게 죄를 얻겠다”고 진술하며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풍남문 밖, 최초 박해의 피 묻은 자리
당시 조선 조정은 ‘유교적 공질서 파괴’에 대한 경고를 필요로 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내려진 형은 참수형, 장소는 전주 풍남문 밖, 오늘날의 전동성당 터였다. 두 사람의 목은 백성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 성벽에 매달렸고, 흘러내린 피는 성벽 안으로 스며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 사건을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 ‘신해박해’로 규정하며, 두 사람을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로 기억한다.
박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01년, 순조 즉위와 더불어 정국을 뒤흔든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같은 장소 풍남문 밖과 전주옥, 숲정이 등지에서 또다시 피가 흘렀다. 천주교 선교와 서양 문물 수용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국사범’으로 몰린 유항검 일가와 신자들 다수가 전주에서 처형됐고, 이들의 시신은 훗날 완주 치명자산과 초남이성지 등지에 비밀리에 옮겨졌다.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전주 박해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디. 그는 전주 지역에서 천주교 교리를 전파한 대표적 지도자로, 호남 교회의 조직적 기반을 만든 인물로 평가된다. 유항검은 단순한 신자가 아니라 교리 교육과 공동체 운영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일종의 신앙 거점 역할을 했으며, 가족 구성원 다수가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가문 단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다.
성 조윤호의 순교터(서천교 순교터)
서천교
-전주 박해의 특징은 ‘집중성’
전주 박해의 가장 큰 특징은 ‘집중성’이다. 신해박해와 신유박해를 거치며 전주는 전라도 지역 천주교 사건의 처리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는 행정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전라감영이 위치한 전주는 사법·행정 권한이 집중된 곳으로, 각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전주로 압송돼 최종 처벌을 받는 구조였다. 결과적으로 전주는 호남 지역 순교 사건의 ‘종착지’가 됐다. 이 같은 구조는 전주를 한국 천주교사에서 서울·충청 지역과는 또 다른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서울이 교회 지도층 박해의 중심이었다면, 전주는 지역 공동체 단위 탄압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범바위
범바위
-치명자산과 초남이, “전주 박해의 지문”
전주 완산구 치명자산은 본래 승암산·중바위산으로 불리던 작은 산이다. 신유박해 당시 전주 남문 밖과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된 유항검 일가와 신자들을 밤중에 거두어 안장하면서 이 산은 ‘치명자산(致命者山)’ 혹은 ‘루갈다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항검 부부와 자손들 7인의 유해가 한 묘역에 모여 있고, 이들 가운데 다섯 명은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 때 복자로 시복됐다.
더 놀라운 이야기는 200여 년의 시간 간격을 건너 최근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2021년,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성역화 작업 과정에서 순교자로 추정되는 인골과 유물이 출토됐고, 정밀 조사 결과 윤지충·권상연·윤지헌 세 복자의 유해로 확인됐다.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 순교자들의 유해가 사후 200여 년 만에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면서, 전주·완주 일대 박해사가 다시 조명되는 계기가 됐다.
숲정이 성지
숲정이 성지
-성벽의 돌이 성당의 주춧돌로
전동성당의 역사는 이 피의 기억을 ‘건축’으로 이어붙인 독특한 사례다. 윤지충이 참수된 지 꼭 100년이 지난 1891년,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가 이 땅을 매입하고 성당 건립에 착수했고, 1914년 완공된 성당은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도면을 맡았다.
당시 일제는 폐성령을 통해 전주성을 헐고 있었고, 교회는 그 성벽에서 나온 돌과 흙을 일부러 가져와 주춧돌과 벽돌로 썼다. 전주성의 피 묻은 돌을 다시 ‘성전의 흙’으로 사용하는 선택은, 국가권력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킨 이들의 희생을 땅과 건축에 새겨넣겠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이 자리는 198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며 “천주교 최초 순교지이자 호남 선교의 모태 본당”이라는 역사적 위상을 인정받았다.
지금 전동성당은 한옥마을의 대표 관광명소다. 주말이면 사진 촬영과 문화 투어, 종교 문화 체험 프로그램으로 북적이고, 성당은 ‘호남의 모태 본당’으로서 순례자 미사와 교육, 지역사회 돌봄을 이어가고 있다. 치명자산·초남이성지·숲정이성지 등 전주·완주 일대 박해 관련 성지는 종교를 떠나 근현대 인권사·사상사 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성지들을 잇는 서사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인간을 죽일 수 있는가”, “국가가 정한 공질서와 개인의 양심·신앙이 충돌할 때 어디까지가 국가의 권한인가”라는 질문을 지금 우리에게 던진다. 한국 사회는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상식은 풍남문 밖에서 잘려나간 목과 바우배기 흙 속에 숨겨졌던 유해, 치명자산에 몰래 안장된 시신 위에 세워진 역사임을 전주 박해사가 증언한다.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들의 유해가 드러난 이 시점에, 전주는 ‘관광도시’와 ‘순교도시’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품은 공간이 됐다. 피 묻은 돌 위에 세워진 성당과, 밤을 틈타 산으로 옮겨진 시신, 230년 만에 빛을 본 유해… 이 서사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시민 교육과 인권 감수성, 지역 정체성으로 이어갈 것인지가 오늘의 과제다. 최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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