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월 3일자 전라매일(전라일보 전신) 1면 헤드라인은 '高기술로 萬里長城 넘어'였다. 전북의 중소기업 원광전자가 중국 대련 경제기술개발구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초소형 전구를 연간 2억4000만개 생산해 미국·일본·유럽에 수출한다는 내용이다. 75% 자동화 생산라인, 98%를 웃도는 양품률. 고기술과 값싼 중국 노동력의 결합이 전북 기업의 세계화 모델로 제시됐다. 30년이 지났다. 그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보물창고' 중국이 경쟁자로 돌변했다
1990년대 전북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한 핵심 논리는 인건비였다. 원광전자 대표는 당시 "중국인 노동자의 손재주는 한국인 못지않아 품질이 매우 우수하다"며 중국을 '보물창고'라고 불렀다. 낮은 임금에 높은 품질. 그 격차가 수익의 원천이었다.
지금은 정반대다. 중국의 임금 수준이 급격히 오른 데다, 중국 기업들이 자체 기술력으로 저가 제품 공세를 벌이고 있다. 전북 전통 제조업은 원자재 가격 상승, 글로벌 경기 침체, 중국의 저가 공세 등 복합적 요인으로 경쟁력이 약화되며 매출이 감소하고 있다. 30년 전 전북 기업의 경쟁 우위를 만들어줬던 중국이 이제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가 됐다.
전국적으로도 탈중국 흐름은 가속화하고 있다. 한국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5년 상반기 18.2%로 2003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때 30% 이상이었던 대중 수출이 2024년 말 19.5%까지 낮아진 후 하락 추세가 지속하고 있다. 전북 기업의 주력 수출 대상국 역시 미국(20.1%)이 중국(16.6%)을 앞지르는 구조로 재편됐다. 1990년대 '중국행 일방통행'의 시대는 끝났다.
◆수출은 늘었지만 구조는 여전히 취약
수치만 보면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2025년 11월까지 전북의 누적 무역수지 흑자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38.4% 증가한 11억2900만달러로 집계됐다. 군산조선소 재가동과 자동차·기계 부문이 수출 회복을 이끌었다.
그러나 속은 달랐다. 2025년 1월 전북 수출은 4억7000만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8.7% 감소했으며, 제조업 생산도 12.9% 줄었다. 흑자 확대가 수출 증가보다 수입 감소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는 뜻이다.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며 교역 여건 개선이 지연되고 있고, 제조업 생산 및 설비투자 등 산업 관련 지표의 하락세가 실물 경제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업 규모도 문제다. 전국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 중 전북에 본사를 둔 기업은 총 10개사에 불과하며 전국 대비 매출액 비중은 0.28%에 그쳐 산업 구조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1995년 원광전자 한 곳이 연간 100억원 매출을 바라보던 시절과 비교해, 30년이 지난 지금 전북 전체 산업 지형의 구조적 빈곤이 오버랩된다.
여기에 내수 위축까지 겹쳤다. 고물가·고금리에 따른 내수 위축이 심화되며 지역 경기 전반의 회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출도 막히고, 내수도 막힌 이중고다.
생성형AI 제작
◆전국 수출 사상 최대인데 전북만 제자리
2025년 한국 전체 수출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2025년 수출은 전년 대비 3.8% 증가한 7097억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7000억달러를 돌파했다. 반도체·바이오·K-뷰티가 이 성장을 이끌었다. 전북의 주력 품목인 기계·화학·자동차 부품은 이 흐름에서 비켜나 있었다.
2025년 상반기 수출 실적에서 바이오·헬스(11.0%), 무선통신(8.5%), 고부가가치 선박 등이 증가하며 수출 품목 구성이 바뀌고 있다. 전북이 이 고부가가치 품목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전국 수출 호황과 전북 수출 정체의 간극은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새 돌파구: 새만금·피지컬AI
전북도가 내세우는 돌파구는 두 갈래다. 새만금과 피지컬AI다.
새만금 수소도시·재생에너지 클러스터는 탈중국 공급망 재편 속에서 전북이 새 제조 거점으로 자리잡을 기회다. 1995년 대련 경제기술개발구가 중국의 '보배'였던 것처럼, 새만금이 전북 기업 세계화의 새 발판이 돼야 한다는 논리다. 국토부 장관이 새만금 현대차 투자와 수소도시 조성을 직접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피지컬AI는 더 근본적인 변화를 겨냥한다. 1995년 원광전자가 중국인 노동력과 자동화 라인을 결합해 경쟁력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AI와 로봇 기술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값싼 노동력 없이도 품질과 원가를 동시에 잡는 구조다.
전북연구원은 산업 포트폴리오 다각화, 주력 산업의 고부가가치화, 기술 혁신 기반 근본적 체질 개선이 경제 회복의 핵심 과제라고 진단했다. 방향은 맞다. 문제는 속도다.
◆30년 전 결론, 지금도 유효하다
1995년 대련 공장을 취재한 기자는 이렇게 썼다. "고도의 기술력과 값싼 노동력이 조화를 이루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도 무난히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전북이 찾아야 할 결론도 다르지 않다. 고기술과 저비용의 결합. 다만 '저비용'의 원천이 중국 노동력에서 AI·로봇·재생에너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만리장성은 여전히 높다. 넘는 방법만 달라졌다./황성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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