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징어
6월은 서해와 남해를 따라 갑오징어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계절이다. 해양수산부가 6월의 어식백세 수산물로 바다장어와 함께 갑오징어를 꼽을 만큼, 지금이 바로 제철이다. 산란기를 거치며 씨알이 굵어지는 봄철과 맞물려 5~6월 서해안 어장은 “올해도 갑오징어 풍년”이라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갑옷 갑(甲)’이 붙은 오징어
갑오징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흔히 “오징어 계의 갑(甲)”이라 해서 1등이라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제 한자는 ‘갑옷 갑(甲)’을 쓴다. 연체동물인 오징어류 가운데 드물게 몸 안에 단단한 석회질 뼈를 하나 품고 있는데, 이 길쭉한 타원형의 뼈 모양이 마치 얇은 갑옷이나 작은 배처럼 생겼다 해서 ‘갑옷 오징어’, 곧 갑오징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우리 바다에 사는 오징어류는 80여 종에 이르지만, 이렇게 뚜렷한 ‘뼈’를 가진 종류는 갑오징어가 유일하다. 예부터 어부들은 이 하얀 뼈를 따로 모아 말려 두었다가 약재처럼 쓰거나 아이들 장난감으로 던져 주기도 했다. 바닷가 마을 처마 밑에 매달린 납작한 하얀 뼈를 보고 ‘올해도 갑오징어가 잘 잡혔구나’ 짐작하던 풍경이 과거에는 낯설지 않았다.
옛 문헌 속 ‘오징어’는 사실 갑오징어
이름의 사연은 여기서 한 번 더 꼬인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먹는 ‘살오징어’가 아닌, 옛 문헌에서 ‘오징어(烏賊魚)’라 부른 대상은 사실 갑오징어였다는 연구도 제기된다. 과거에는 지금의 살오징어를 ‘꼴뚜기’라 불렀고, 검고 괴이한 모양으로 먹잇감을 홀리던 갑오징어를 ‘오적어(烏賊魚)’라 하여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중국과 우리 고전 속에서 ‘오적어’는 종종 교활한 물고기를 상징한다. 몸에서 새까만 먹물을 뿜어 적을 속이고, 순식간에 몸빛을 바꿔 주변과 동화되는 모습이 사람 눈에는 ‘속임수’나 ‘요물’처럼 보였을 터다. 현대 과학은 이 능력이 100만 개에 이르는 색소 세포 덕분임을 밝혀내며 갑오징어를 ‘바다의 카멜레온’이라 부르고 있다.
바다의 카멜레온, 삶터는 얕은 서해
갑오징어는 우리나라 전 연안에 널리 분포하지만, 특히 서해 중부 해역에서 많이 잡힌다. 수심 20~30m 안팎의 진흙 또는 모래가 섞인 진흙 바닥을 좋아하고, 몇 마리에서 수십 마리가 무리를 이뤄 바닥 가까이 머무는 저서성 오징어류다. 다른 오징어처럼 멀리 바다를 회유하기보다는 한 자리에서 먹이와 산란장을 챙기며 사는 ‘터줏대감’에 가깝다.
봄이 되면 얕은 연안 암초와 해조류에 알을 촘촘히 붙인다. 반투명한 포도송이 같은 알집이 수초 사이에 매달린 모습은 어촌 아이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산란을 마친 어미 대부분은 그해를 끝으로 생을 마치는데, 이 짧은 일생 덕분에 “봄 갑오징어는 살이 꽉 차고 맛이 깊다”는 말이 생겼다.
옛 바다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과 이야기들
서해 갯마을에는 갑오징어를 둘러싼 옛이야기들도 전해진다. 전승 설화 속에는 “갑오징어가 친구를 데려온다”는 민담이 남아 있는데, 통발에 밴댕이를 통째로 꿰어 놓으면 호기심 많은 갑오징어가 몰려와 줄줄이 잡혔다는 내용이다. 먹잇감 냄새를 좇다가 줄에 엮인 미끼에 홀려 한꺼번에 걸려드는 습성을 ‘친구를 데려온다’는 표현으로 풀어낸 것이다.
서천 장항항 일대에서는 꼴뚜기와 갑오징어의 이름을 따 ‘꼴갑축제’를 열어 맨손으로 갑오징어를 잡는 체험을 선보이기도 한다. 썰물 때 뻘밭을 뒤지며 알이 포도송이처럼 달린 해조를 찾아내고, 허둥대는 갑오징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 아이들은 “바다의 마술사”와 처음 마주한 흥분을 오래 기억하게 된다.
옛날 어른들은 먹물을 ‘바다의 먹’이라 불렀다. 솥에서 끓는 검은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으며 “이걸 먹어야 눈이 밝아진다”고 아이들을 달랬고, 선원들은 먹물이 퍼지는 방향을 보고 물살과 바람을 가늠해 항로를 짚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현대에는 이 먹물이 파스타, 리소토 등 서양식 메뉴로 변신해 젊은 세대의 입맛을 붙잡고 있다.
영양은 ‘갑’, 가격은 아직 ‘을’
영양 면에서만큼은 갑오징어가 ‘오징어 계의 갑’이라는 별명이 과장이 아니다. 지방 함량이 적고 단백질이 풍부해 다이어트 식단에 적합하고, 피로 회복에 좋은 타우린을 다량 함유해 기력 보충에도 효과적이라는 평가다. 해양수산부가 “오징어류 가운데 맛이 으뜸”이라고 소개할 만큼, 봄·초여름 제철 갑오징어의 쫄깃한 식감과 단맛은 미식가들의 인정도 받았다.
제철 서해안에서는 갑오징어를 회와 숙회, 초무침, 볶음, 탕으로 두루 즐긴다. 막 잡아올린 갑오징어를 얇게 썰어 초장에 찍어 먹고, 머리와 다리는 고추장 양념에 볶아 밥 위에 올리면 더 반찬이 필요 없다. 향긋한 미나리와 함께 새콤달콤하게 무친 초무침은 봄·초여름 밥상을 대표하는 별미로 꼽힌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오징어류 자원 감소와 수요 증가가 겹치며 ‘바다의 갑’답게 몸값도 조금씩 올라가는 추세다. 현장 어민들은 “예전처럼 배 가득 싣고 돌아오기는 어렵지만, 제철 손맛과 입맛 하나만큼은 여전히 최고”라고 말한다.
6월, 한 접시의 계절을 놓치지 말자
6월은 바다가 허락한 한철 맛과 함께, 이름과 모양 속에 응축된 옛 바다 사람들의 지혜와 이야기를 떠올리기 좋은 달이다. 식탁 위 하얀 살점 한 점, 검은 먹물 한 숟가락에도 ‘갑옷 같은 뼈’를 품고 살아온 작은 생명의 서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제철 한 접시 갑오징어를 앞에 두고, 그 이름의 유래와 옛이야기를 곁들여 독자에게 전하는 것이야말로 신문 특집이 할 수 있는 가장 풍성한 ‘반찬’일지 모른다. 당신이라면, 올 6월 첫 갑오징어를 회로, 초무침으로, 아니면 먹물 파스타로 어떻게 맞이하겠는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