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재용 삼성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사진=각 사
한국금융경제신문=허지현 기자 | 2026년 대한민국 재계의 시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SK그룹 최태원 회장, LG그룹 구광모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이 연초부터 ▲인공지능(AI) ▲반도체 ▲미래 에너지라는 3대 핵심 전장(戰場)을 중심으로 유례없는 ‘글로벌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해외 사업지를 둘러보는 차원을 넘어 고착화 되는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자사 공급망을 사수하고,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의 ‘AI 동맹’을 공고히 하려는 전략적 승부수로 풀이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신(新)실용주의와 전방위 네트워크로 공급망 돌파
이재용 회장은 2026년 들어 유럽과 중국을 잇는 거대한 대장정을 소화하며 삼성표 실용주의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회장의 행보는 크게 ‘공급망 수호’와 ‘미래 모빌리티 선점’이라는 두 축으로 나눌 수 있다.
지난 3월 이 회장은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발전고위급포럼(CDF)에 참석해 중국 경제 사령탑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발개위) 주임을 독대했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삼성전자의 최대 시장이자 생산 거점인 중국과의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재확인하는 행보였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기술에는 국경이 없으며,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파트너십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지정학적 리스크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또한 베이징 방문 기간 중 이 회장은 샤오미의 레이쥔 회장, BYD의 왕전푸 회장 등 중국을 대표하는 빅테크 및 전기차 수장들과 릴레이 회동을 가졌다. 이는 삼성전자가 강점을 가진 온디바이스 AI 반도체와 차량용 전장 부품 시장에서 실익을 챙기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중국 로컬 기업들의 급성장을 견제하는 대신, 이들을 고객사로 확보해 하이엔드 부품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회장은 중국 방문 직전 유럽으로 날아가 BMW와 메르세데스-벤츠 경영진을 잇달아 만났다. 삼성SDI의 최첨단 배터리 공급 협상을 직접 주도하며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의 주도권을 노린 것이다. 단순한 부품 공급자를 넘어 차량 기획 단계부터 함께 협력하는 ‘토털 솔루션 파트너’로서 삼성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는 평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글로벌 AI 가치사슬의 핵심 파트너십 구축
최태원 회장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 AI 업계가 주목하는 ‘HBM(고대역폭메모리) 리더십’을 공고히 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최 회장의 행보는 AI 하드웨어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들과의 ‘밀월 관계’를 다지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최 회장은 지난 3월 미국 산호세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연례 개발자 행사 ‘GTC 2026’ 현장에 직접 참석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의 회동은 이번 출장의 백미였다. 두 수장은 차세대 HBM 공급뿐만 아니라 메모리 가격 안정화, 그리고 AI 가속기의 최적화 설계를 위한 기술 협력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가 판을 깔고 SK가 그 핵심 엔진을 공급하는 ‘AI 혈맹’이 이번 만남으로 더욱 견고해졌다”고 분석했다.
최 회장은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도 지속적인 교감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추진하는 1000억 달러 규모의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에 SK가 핵심 파트너로 참여하는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이는 삼성전자와 협력하는 동시에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행보라고 볼 수 있다. 최 회장은 AI 인프라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SK의 메모리 기술이 표준이 되도록 만드는 ‘표준화 전쟁’에 직접 참전한 상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미래 에너지와 ‘글로벌 사우스’ 신흥 시장 선점
구광모 회장은 AI 시대를 지탱할 근간인 ‘에너지’와 인구 보너스 효과가 기대되는 ‘글로벌 사우스’ 시장을 공략하며 LG의 미래 지도를 그리고 있다.
구 회장은 지난달 말,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LG에너지솔루션의 자회사 ‘버테크’를 방문했다. AI 데이터센터가 급증함에 따라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은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올랐다.
구 회장은 현장에서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 능력을 갖춘 기업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배터리 제조를 넘어 에너지 관리 시스템(EMS) 전반을 아우르는 사업 확장을 독려했다.
미국 일정을 마친 구 회장은 곧바로 지구 반대편인 브라질로 향했다. 중남미 최대 시장인 브라질을 거점으로 인도, 아세안 등 소위 ‘글로벌 사우스’ 지역에서의 시장 점유율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
현지 생산법인과 유통망을 점검한 구 회장은 프리미엄 가전뿐만 아니라 현지 맞춤형 미래 에너지 솔루션을 통해 LG의 영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26년 현재, 대한민국 3대 그룹 총수들의 행보는 단순한 기업 경영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 경제 안보와도 직결되어 있다. 미·중 패권 전쟁이라는 거대한 파고 속에서 이들은 ‘AI-반도체-에너지’라는 삼각 편대를 통해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의 총수 경영이 내부 효율화와 국내 시장 방어에 치중했다면 2026년의 총수 경영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세일즈 외교관’의 역할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불확실한 대외 환경 속에서 총수들이 직접 발로 뛰며 맺어놓은 ‘글로벌 네트워크’가 향후 10년 대한민국의 먹거리를 결정지을 결정적 자산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의 문법이 바뀌는 격변의 시기, 이재용·최태원·구광모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의 광폭 행보가 가져올 성적표에 전 세계 경제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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