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한 자리가 다섯 달 넘게 비어 있다. 지난 3월 노태악 대법관이 퇴임했지만 후임은 감감무소식이다. 후보가 없어서가 아니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1월 4명의 후보를 올렸다. 통상 2주 안팎 걸리는 제청 절차가 반년 넘게 멈춰 있다. 청와대와 조희대 대법원장이 최종 후보를 놓고 평행선을 달리는 탓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다음달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의 후임 후보 4명도 지난 4일 추려졌다. 이마저 늦어지면 대법관 두 자리가 동시에 비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대법관 한 명이 연간 3500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하는 현실에서 두 명의 공백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재판은 늦어지고,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헌법 제104조 2항은 대법관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다. 세 헌법기관에 권한을 나눠놓은 것이다. 사법부 독립을 위해 대법원장에게 제청권을 주되, 국회와 대통령의 견제를 받도록 했다. 어느 한쪽도 대법관 인사를 독점할 수 없도록 만든 장치다.
그래서 역대 정부에서는 공식 제청에 앞서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의견을 조율했다. 진통이 없지는 않았다. 2003년엔 노무현 대통령과 최종영 대법원장이 정면충돌했다. 서열과 기수를 중시한 대법원장의 구상에 청와대와 법원 소장파가 거세게 반발하면서 ‘사법파동’으로 번졌다. 하지만 선을 넘진 않았다. 최 대법원장은 김용담 광주고등법원장을 제청했고, 노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2009년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에도 이명박 대통령과의 이견으로 제청이 보름 가까이 지연됐지만 민일영 청주지방법원장을 제청하며 수습됐다.
역대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을 끝까지 거부하지 않은 건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청이라는 공식 절차 전에 물밑에서 해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권한을 존중하면서도 제도가 멈춰서는 상황만큼은 피한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후보가 추천된 지 반년이 지나도록 제청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차적 책임은 제청권자인 조 대법원장에게 있다. 대통령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제청 자체를 무기한 미룰 수는 없다. 헌법이 부여한 제청권은 적임자를 책임 있게 추천하라는 뜻이지,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자리를 비워두라는 면죄부가 아니다. 사법부 독립이 국민의 ‘신속하게 재판받을 권리’ 위에 서 있을 순 없다.
청와대도 돌아볼 대목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특정 후보를 사실상 비토하며 원하는 인사를 요구한다면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껍데기가 된다. 대법원장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순서에는 이유가 있다. 정치권력이 사법부 구성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헌법적 설계다.
그렇다고 두 자리를 놓고 ‘하나씩 주고받기’ 식으로 해결하는 것도 곤란하다. 당장의 교착은 풀릴지 몰라도 대법관 인사를 흥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나쁜 선례를 남긴다. 다만 조율 자체를 금기시할 필요는 없다. 치열하게 듣고 설득하고 타협하는 것은 권력분립의 훼손이 아니라 이를 작동시키는 과정이다.
마침 선택지는 넓어졌다. 모두 8명이 대법관 후보에 올라 있다. 조 대법원장은 최근 추천위원들에게 후보 제청을 잘 매듭짓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제 행동으로 보여줄 때다. 대법원은 정원 확대라는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현재 14명인 대법관은 2028년부터 매년 4명씩 늘어 26명 체제로 개편된다. 지금 두 자리조차 제때 채우지 못한다면 향후 인선에서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인선은 단순히 대법관 두 명을 뽑는 문제가 아니다. 정치권력과 사법부가 어떤 원칙과 방식으로 대법원을 구성할지 가늠하는 첫 시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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