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와 고체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 새로운 물질 상태 ‘초고체(Supersolid)’를 시각화한 이미지. photo 제미나이 생성
우리 주변의 물질은 보통 한 가지 상태에 머문다. 고체인 얼음은 딱딱하게 형태가 고정되어 있고, 액체인 물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흐르며 마찰에 의해 출렁거린다. 그런데 지난 3월 16일 발표된 국제학술지 '네이처 나노테크놀러지'에 실린 글에 따르면 미국 렌셀러폴리테크닉대 웨이 바오 교수 연구팀은 이처럼 상반된 두 성질을 동시에 지닌 새로운 물질 상태 '초고체(Supersolid)'를 '상온'에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초고체는 겉보기에 언뜻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특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고체처럼 질서정연한 결정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초유체처럼 저항 없이 흐를 수 있다. 일반적인 액체는 중력에 의해 아래로 고이지만, 초유체를 그릇에 담아두면 마찰이 없는데다 입자와 그릇 벽면 사이의 인력이 중력보다 강해 벽면을 타고 올라가 밖으로 탈출하기까지 한다.
즉 초고체는 '단단한 얼음 덩어리인데 그 속의 입자들은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처럼 마찰 없이 쌩쌩 달리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바오 교수팀의 성과가 놀라운 것은, 이 신비로운 현상을 극저온이 아닌 우리가 사는 상온 환경에서 실현해냈다는 사실이다.
고체와 액체의 기막힌 동거
지금까지 초고체는 절대영도(-273.15°C)에 가까운 극저온 조건에서만 관찰됐다. 온도가 높으면 입자들이 에너지를 얻어 사방으로 튀어올라 부딪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뭉쳐 '마찰 없는 흐름'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거대한 냉각 장치를 동원해 온도를 절대영도까지 낮춰왔다. 입자들이 에너지를 잃고 움직임이 멈추도록 꽁꽁 얼려야만, 비로소 물질의 행동을 지배하는 양자 효과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지점이 절대영도였다. 지금까지 초고체를 관찰하기 위해 거대한 냉각 장치가 필수였던 이유는 바로 입자들의 역동적 에너지를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양자 역학의 세계에서는 입자들이 더 이상 따로 놀지 않고, 수많은 입자가 마치 한 몸처럼 똑같이 움직이는 '양자 응축' 현상이 일어난다. 마치 축구장 객석에 흩어져 제각각 떠들던 관중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거대한 '파도타기 응원'을 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입자가 하나의 물결처럼 움직이는 이 상태가 바로 초고체의 핵심 조건이다.
연구팀은 입자들이 흩어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 온도를 낮추는 대신 '폴라리톤(Polariton)'이라는 특수한 입자를 활용했다. 폴라리톤은 빛 입자인 광자와 반도체 속 전자가 강하게 결합하여 만들어지는데, 빛처럼 빠르면서도 전자처럼 주변과 전기적으로 반응하는 특성을 띤다. 이처럼 빛과 물질의 특성을 모두 지닌 폴라리톤은 같은 종류의 입자 간 상호작용이 매우 강하다. 입자끼리의 이 강한 결합력 덕분에 상온이라는 고온의 환경에서도 입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양자 상태로 뭉칠 수 있다.
상온에서 초고체를 만들려면 '결정 구조(고체)'와 '자유로운 흐름(초유체)'이라는 두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연구팀은 나노 크기 장치 내부에서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 방식을 조절해 초고체라는 새로운 물질 상태를 만들어냈다.
먼저 반도체 소재인 페로브스카이트 결정을 얇고 평평한 막 형태로 만든 뒤, 이를 빛을 가두고 형태를 조절하는 나노미터(㎚·10억분의1미터) 크기의 격자 구조물과 결합해 소자를 제작했다. 소자가 빛을 안정적으로 가두고 설계대로 작동하도록 줄무늬 형태의 격자 표면에는 굴절률이 높은 이산화타이타늄을 얇게 코팅했다. 이 시스템에 레이저를 쏘자 폴라리톤 입자들이 생성됐다. 이 입자들은 하나의 양자 상태로 응집되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격자 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에너지가 넘치는 상온에서도 입자들이 튕겨나가지 않고 특정 상태에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폴라리톤들은 최소 에너지 상태에서 균일한 상태로 응축됐다. 그러나 입력 에너지가 증가함에 따라 시스템은 극적 변화를 겪었다. 레이저를 쏠 때마다 줄무늬의 위치가 매번 다르게 형성된 것이다. 이는 전체 시스템 자체는 양자 결맞음을 유지하는 응집력을 가지면서도, 마치 결정처럼 질서정연한 줄무늬 형태의 격자를 자발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고 한다. 물리학 시스템의 기본 법칙은 대칭적이지만, 실제로는 그 대칭성을 따르지 않고 특정 방향을 선택해 무질서가 해소되는 현상이다. 이것이 초고체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결정적 특징이다.
무도회장에 이를 비유한다면, 무질서하게 있던 무용수들이 음악이 나오자 서로 손을 맞잡고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맞춰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줄을 맞췄으니 '고체'이고, 그 상태로 마찰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니 '초유체'인 셈이다. 다시 말해 폴라리톤들이 스스로 규칙적인 격자 구조를 만들면서도, 그 안에서 마찰 없이 흐르는 초유체의 상태를 구현한 것이다.
이후 연구팀은 시스템에 더 많은 에너지가 공급될수록 줄무늬 간격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이 패턴이 외부에서 강제로 고정시킨 구조라면 간격이 변하지 않았겠지만, 입자들이 스스로 만든 구조이기에 고무줄처럼 유연하게 변화될 수 있었다. 이 물질이 진짜 초고체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여기에 있다.
우리 일상을 바꿀 '발열 제로'의 미래
상온 초고체의 구현은 비싼 냉각장치 없이도 양자역학적 특성을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덕분에 극저온 시설을 갖춘 연구소에서만 제한적으로 관찰되던 양자 현상을 이제 우리 주변의 일반 환경에서도 탐구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이 기술은 전자기기의 고질적 문제인 '발열'을 해결할 핵심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스마트폰을 오래 사용할 때 기기가 뜨거워지는 이유는 내부의 전자가 이동하며 주변 입자들과 부딪혀 마찰열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체 소자를 초고체 물질로 만든다면, 전자가 마찰 없이 이동해 열이 전혀 나지 않는 기기를 구현할 수 있다.
또한 미세 진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초정밀 센서를 만들어 지진 감지나 의료 진단에 활용할 수도 있다. 초고체 내부의 입자들은 양자역학적인 '파동(물결)' 성질을 띠므로, 미세한 지표면의 흔들림이나 몸속 신호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해 이상 징후를 포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상온에서 양자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양자컴퓨터의 대중화도 앞당겨질 전망이다. 거대한 냉각 시설 없이도 양자 정보를 손실 없이 처리할 길이 열리면서, 미래의 초고속 컴퓨팅 환경이 우리 책상 위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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