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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윤비의 위험한 국가 길들이기]잘못된 중국 배우기와 권위주의의 그림자

현대 민주주의국가는 항상 통치의 효율성과 민주주의적 정당성 사이에서 헤맨다. 범죄자를 찾아내고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가택 수색을 하거나 도청해서는 안 된다.

[윤비의 위험한 국가 길들이기]잘못된 중국 배우기와 권위주의의 그림자

현대 민주주의국가는 항상 통치의 효율성과 민주주의적 정당성 사이에서 헤맨다. 범죄자를 찾아내고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가택 수색을 하거나 도청해서는 안 된다.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자원과 자본을 투자해야 하지만, 공정한 분배와 기회의 균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극도로 복잡하고 심지어 모순적이기까지 한 임무를 해결하는 데 아무리 발달한 민주주의국가라 해도 한계가 있다.

국가의 이런 ‘무능과 비효율’에 지친 시민들에게 때로 권리니 원칙이니 하는 소리는 배부른 자의 사치처럼 들린다. 누군가 모든 것을 움켜쥐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일진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특수부대 출신을 뽑아 초법적인 권력을 부여해 학교에서 ‘참교육’하게 하면 된다. 법망을 빠져나가는 파렴치범들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정의로운 해결사 조직을 만들어 택시회사든 버스회사든 간판 하나 걸어놓고 대신 복수하게 하면 된다.

중국 굴기를 부러워하는 글 넘쳐

다시 고개 드는 ‘박정희식 성장론’

어떤 성장인가가 그 못지않게 중요

민주주의답게 싸우고 성장해야

애석하게도 한국은 그런 권위주의적 상상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나라이다. 무능한 지도자들이 법이니 민주주의니 떠들고 있을 때 박정희가 나타나 민족을 가난과 멸시로부터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나라를 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나라이다. 김대중을 비롯해 여러 정치인들은 한때 권위주의의 편에 서 있던 정치인들과 힘을 합하면서 이들을 산업화 세력이라고 불렀다. 그 신박한 용어로 권위주의적 과거에 모종의 정당성이 부여됐다. 지금까지도 권위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과 태도는 모순적인 곳이 많다. 권위주의는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권위주의 없이 지금의 선진국 대한민국이 가능했을까를 물으면 말이 꼬리를 흐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기억은 현재와 미래를 보는 눈을 흐린다. 철권의 독재자가 때로 먹고사는 데는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그릇된 신화에 취해 심지어 유신에 저항했던 사람들마저 죽은 아버지의 현신처럼 굴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권위주의의 유산이 발톱을 드러냈다. 그 퇴행성이 요즘 중국 붐을 타고 또다시 사회 안에 재연되고 있다. 첨단산업과 기술 분야에서 우리가 이미 뒤처졌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작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한 다큐멘터리는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 미친 한국’이라는 자극적이고 편파적이기까지 한 제목으로 사람들의 호기심과 불안감을 자극했다.

요즈음은 그런 비슷한 논조의 글들이 너무 많아졌다. 어떤 글들은 중국과 한국을 마치 낮과 밤처럼 대조하며 중국을 당장 배워야 한다고 열을 올린다. 굴기를 가능하게 한 중국공산당의 ‘눈치 보지 않는 강한 리더십’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순간 원죄이고 그릇된 사치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주 52시간 노동제를 포함해 시민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고민하고 만들어 온 안전장치에 회의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환경이나 분배의 문제들은 이야기 꺼내기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가 겪는 한순간의 성공과 실패에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려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의 가치와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 과거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갈 때는 미국의 자유정신과 개척정신에 대한 찬양론이 줄을 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 일본의 기업들이 자동차 산업부터 전자제품까지 소형화를 이끌며 성공을 거두자 한국에서는 그 원인이 일본인의 ‘축소지향문화’에 있다며 말의 잔치가 벌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이론들에는 지나친 단순화와 일면적인 주장이 너무 많았다. 지금의 중국에 대한 시각에서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성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는 어떤 성장인가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키울 그런 성장이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한국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제도를 최대한 지키면서도 효율적인 방역을 추구하는 전략을 택했다. 도시 봉쇄를 비롯한 모든 강압적 수단을 주저 없이 동원했던 이웃 중국과는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나는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적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답게 싸웁니다.’ 성장도 그래야 한다. 민주주의다워야 한다.

윤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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