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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윤덕우 칼럼] 코스피 9,000선 돌파의 신기루와 ‘8조 원’의 비명

코스피가 마침내 9,000선을 돌파했다. 한국 자본시장 역사에서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영역이다. 오랜 기간 2,000~3,000선 박스권에 갇혀 있던 증시를 생각하면 분명 의미 있는 이정표다.

[윤덕우 칼럼] 코스피 9,000선 돌파의 신기루와 ‘8조 원’의 비명

윤덕우 주필

코스피가 마침내 9,000선을 돌파했다. 한국 자본시장 역사에서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영역이다. 오랜 기간 2,000~3,000선 박스권에 갇혀 있던 증시를 생각하면 분명 의미 있는 이정표다. 증권가와 시장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해소”와 “1만 포인트 시대의 개막”을 이야기하며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다.

그러나 모든 숫자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숫자가 현실을 가리는 거대한 착시가 되기도 한다. 지금의 코스피 9,000 역시 그런 질문 앞에 서 있다. 과연 이 숫자가 한국 경제 전체의 성장과 기업 생태계의 건강성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 초대형 종목의 독주가 만들어낸 착시인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번 상승장의 중심에는 단연 반도체가 있다. 인공지능(AI) 혁명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확대 기대 속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대형주들이 시장을 사실상 견인했다. 외국인과 기관 자금은 이들 종목에 집중적으로 몰렸고, 지수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하지만 시장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지수가 최고치를 경신하는 동안 상당수 종목은 오히려 하락했다. 많은 개인투자자들이 “지수는 오르는데 내 계좌는 마이너스”라고 하소연하는 이유다. 상승의 온기가 시장 전체로 확산되지 못한 채 일부 대형주에만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쏠림 현상이 단순한 시장 현상을 넘어 한국 자본시장의 구조적 병폐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소수 대기업이 모든 유동성을 흡수하는 동안 중소형주들은 점점 시장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기업의 실적과 성장성보다 수급의 유무가 주가를 결정하는 왜곡된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셈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중소형주의 생존 위기다. 현재 국내 증시에는 1,000원 미만의 이른바 ‘동전주’가 200여 개를 넘는다. 전체 상장사의 적지 않은 비중이다. 이들 기업 상당수는 새 상장폐지 규정 시행을 앞두고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시장에서는 단순한 가격 기준만으로 기업의 존폐를 결정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에 대한 논란도 제기된다. 물론 부실기업을 퇴출시키고 시장의 질서를 세우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유동성 부족과 투자심리 악화로 저평가된 기업까지 일괄적으로 퇴출 압박을 받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특히 이들 동전주의 시가총액을 모두 합하면 8조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코스피 9,000 돌파를 자축하는 사이 한편에서는 8조 원 규모의 자산이 증발할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피해는 결국 개인투자자들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주식병합이나 사업 재편, 인수합병 등을 통해 상장 유지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근본 처방이 아니다. 기업 가치 자체가 재평가되지 않는 한 일시적 연명책에 불과하다. 시장의 관심과 유동성이 극소수 종목에만 몰리는 환경에서는 아무리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라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어렵다.

주식시장의 본질은 단순히 주가지수를 높이는 데 있지 않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고, 혁신 기업이 자본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자본시장은 경제의 혈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혈액이 특정 부위에만 몰리고 나머지 영역은 말라가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시장 전체의 건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신뢰의 훼손이다. 기업들은 국내 증시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어렵다고 느끼고, 투자자들은 중소형주를 외면한 채 소수 대형주 추종에만 나선다. 일부 투자자는 아예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면 한국 자본시장의 경쟁력은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

정부와 금융당국 역시 지수 상승이라는 외형적 성과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숫자에 대한 자축이 아니라 시장의 체질 개선이다. 부실기업 정리와 함께 건전한 중소형 기업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실효성 있는 주주환원 정책, 기업지배구조 개선, 소액주주 권익 보호, 투명한 경영 체계 확립 등이 함께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다.

결국 코스피 9,000의 진정한 의미는 숫자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성과가 시장 참여자 다수에게 공유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소수 기업만 웃고 다수 기업과 투자자가 소외되는 상승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금 한국 증시에 필요한 것은 축배가 아니라 성찰이다. 코스피 9,000이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진정한 도약으로 기록될지, 아니면 양극화와 왜곡이 만들어낸 일시적 신기루로 남을지는 지금부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 화려한 지수 뒤에서 신음하는 중소형 기업과 투자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건강한 상승장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윤덕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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