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S 폐지 후 출연연 R&D 포트폴리오 변화 전망
25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제2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정부출연연구기관 통합 기자스터디에서 최영민 한국화학연구원 부원장이 발표하고 있다. 이병구 기자 2bottle9@donga.com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을 국가 임무 중심의 연구기관으로 재편하기 위해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단계적으로 폐지되면서 각 출연연의 연구개발(R&D) 포트폴리오에도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최영민 한국화학연구원 부원장은 25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제2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국가과학기술연구회·정부출연연구기관 통합 기자스터디'에서 "PBS 폐지 이후 전략연구사업을 전체 R&D 투자 비중의 50~60%까지 확대하고 상용화와 기술성숙도(TRL) 향상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PBS는 출연연 연구자가 정부 등 외부 연구개발(R&D)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 연구비 등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는 제도다. 출연연 연구개발 투자 포트폴리오는 기본연구사업과 수탁연구사업으로 구성되며 각 출연연마다 비중은 다르지만 대체로 수탁연구사업의 비중이 컸다.
PBS는 연구자들이 '생계형 R&D'를 하도록 만들어 연구활동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단계별 폐지 절차에 돌입했다. PBS가 완전히 폐지되면 출연연 인건비의 100%가 정부 출연금에서 나오게 된다.
최 부원장은 "국가에서 인건비를 100% 준다는 얘기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하라는 뜻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국화학연구원이 제시한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폐지 이후 연구개발(R&D) 포트폴리오 개요. 화학연 제공
전략연구사업은 탄소중립, 차세대 에너지 등 정부에서 수립한 국가전략기술 분야에 해당하는 연구사업을 말한다. 화학연의 경우 지난해부터 전략연구사업을 5개씩 제안해 왔다. 내년에 선정될 연구사업은 컨설팅이 진행 중이다.
올해부터 2030년까지 수행하는 5개 과제는 분산형 전원으로 송전하기 어려운 기지국 등에 전력을 공급하는 '도심형 융합 에너지 모듈 기술', 유방암과 전립선암 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하는 '차세대 목달리티 치료제 기술'이 있다.
인류 난제인 항생제 내성균에 대응하는 치료제 기술과 자동차용 규제 대응 소재·부품 기술, 인공지능(AI) 자율화 실험실 플랫폼 개발도 추진한다.
앞으로 수탁사업은 정책에 따라 지정하는 정부수탁연구나 산업계에서 수요가 발생하는 민간수탁연구 위주로 약 10~20% 정도로 축소해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최 부원장은 "연구역량이 분산될 수 있기 때문에 소액 개인과제는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본연구사업은 출연연 설립 목적에 맞는 고유 임무 이행을 위한 기초원천 연구 역량을 확보·유지하고 전략연구사업을 발굴하는 데 쓰인다. 국책과제 위주로 갈 경우 탑다운 형태의 업무가 많아지며 연구자들의 자유로운 연구는 상대적으로 제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최 부원장은 "기본연구사업의 70~80%는 새로운 전략연구사업 발굴 중심으로 하고 20~30%는 개인연구 중심의 도전적인 선행연구를 하는 데 투입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현재 정해진 기준은 없다"고 밝혔다.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연구자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치는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화학연은 현재 대형 과제인 글로벌 TOP 전략연구단 2개를 총괄하고 있다. 2024년부터 2029년까지 차세대 이차전지 기술을 확보하는 '시장 선도형 차세대 이차전지 혁신 전략연구단'과 2025년부터 2030년까지 탄소포집활용(CCU) 혁신 기술을 개발하는 '기후위기 대응 이산화탄소 자원화 전략연구단'이다.
국가특임연구원 제도를 활용해 김명환 전 LG화학 사장과 최선 전 한화토탈에너지스 연구소장을 영입하기도 했다. 최 부원장은 "이차전지 전략연구단에서는 배터리 선구자인 김명환 단장을 영입해 제품 개발을 최종 목표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차전지 전략연구단은 아직 2년차로 연구성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업 초반 김 단장이 배터리 3사 최고경영자(CEO)급 인물을 한자리에 모아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하는 등 대학교수나 출연연 연구자 출신이라면 하기 어려웠을 일들을 해낸다는 평가다.
전략연구사업과 관련해 박철호 녹색연 정책연구본부장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 기술 개발을 통한 상품화가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에 정책 연구기관인 녹색연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며 "이후 PBS 폐지 논의와 맞물리며 정책과 인력 양성 꼭지가 새로 추가되면서 올해부터 참여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2022년 혁신본부에서 기술 분야별로 만들어진 기술 개발 전략 로드맵을 업데이트하고 그 계획들이 얼마나 잘 이행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과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정부 수요를 받아 제안 중"이라고 밝혔다.
녹색연은 기후·탄소중립 분야의 기술 정책을 기획하고 국제 협력을 지원하는 곳이다. 기술을 직접 개발하는 여타 출연연과 달리 과학기술계 출연연 중 유일한 기술정책 연구기관으로 국가 R&D 정책 기획, 글로벌 협력 전략 수립, 녹색기술 정보 생산, 인력 양성 정책 수립 등 4가지 주요 기능을 수행한다. 이산화탄소 포집·수송·저장 및 활용에 관한 법률 제정에 참여하고 입법화에 기여했으며, 최근 3년간 녹색·기후기술 확산을 막는 규제 32건을 발굴해 개선안을 제안했다.
산업계가 매력적으로 느낄 정도로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어떤 지원이나 환경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김석주 한국전기연구원 부원장은 "원장 임기와 관계없이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연구를 하자고 해서 '전기연 큰 기술' 제도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전기연 큰 기술은 30년을 내다보고 산업계 파급력이 크고 실패하더라도 국민이 '이런 걸 하는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는 연구를 장기 지원하는 제도다. 원장 임기나 단기 성과에 흔들리지 않도록 외부 전문가, 내부,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연구만 위원회 만장일치로 선정하며 탈락하더라도 보완해 재도전할 수 있다. 성과가 없는 해에는 유예 평가로 나중에 정산하고 교착 상태에선 속도를 조절하며 유연하게 운영하는 방식이다.
현재 3개 아이템이 선정돼 있다. 탄소 나노튜브 구리 복합 도체는 현재 쓰이는 구리보다 가벼우면서 전류를 더 많이 흘릴 수 있는 차세대 전선 소재 개발을 목표로 한다. 방사선 암치료기는 현재 100% 수입에 의존하는 장비를 국산화하는 것이다.
MLCC 마이크로파 유도 가열 공정 기술은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에 들어가는 초소형 적층 세라믹 콘덴서(MLCC) 제조 시 기존 24시간씩 열로 가열하던 소성 공정을 전자레인지 방식으로 전환해 공정 시간을 100분의 1로 단축하는 기술로 이를 실제 양산 공정에 적용하는 상용화가 목표다.
전 세계에서 전기연만 보유하고 있으며 삼성전기에 샘플을 제공했더니 "이렇게 좋은 기술이 있나"라며 놀랐을 정도라고 했다. 방사선 암치료기는 올해 전략 연구 사업으로도 진행하며 사업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