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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월세를 살아도 불행하지 않은 세상 [아침햇발]

10여년 전 처음 기자가 된 뒤 수년간 부동산 시장을 취재했다... 특히 사회 초년생이었던 기자 개인의 삶과 주로 써야 하는 부동산 기사 사이의 괴리가 컸다... 부동산 시장의 가장 약자인 월세 임차인이 주거 비용에 부담이 없다면 주택 문제의 대부분은 해결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여당의 한 실세 정치인과 만난 자리에서 부동산 얘기가 나왔다...

지난 12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매물을 소개하는 전단지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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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오 | 논설위원

10여년 전 처음 기자가 된 뒤 수년간 부동산 시장을 취재했다. 당시 다짐했던 목표가 하나 있다. ‘월세를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월세살이가 행복하긴 쉽지 않다. 목돈 없고 은행 대출을 받기도 어려운 서민은 자가나 전셋집에 사는 사람보다 높은 이율의 월세를 주거비로 부담해야 하는 게 시장의 이치다.

그럼에도 이런 다짐을 했던 건 ‘평범한 서민들을 더 챙겨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특히 사회 초년생이었던 기자 개인의 삶과 주로 써야 하는 부동산 기사 사이의 괴리가 컸다. 서울 강남 재건축이나 고가의 신축 아파트 가격 동향은 누군가에겐 중요한 투자 정보지만 기사로 옮기는 일이 공허했다. 서울 전세 아파트만 해도 부모에게 수억원을 증여받을 수 있는 금수저 청년만 입성할 수 있다. 이들과 달리, 형편이 넉넉지 못한 서민층을 위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무주택 임차 가구 비율은 51.9%(2024년), 전체 주택 중 비아파트 비중은 39.3%(2025년)다. 부동산 시장의 가장 약자인 월세 임차인이 주거 비용에 부담이 없다면 주택 문제의 대부분은 해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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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시절, 여당의 한 실세 정치인과 만난 자리에서 부동산 얘기가 나왔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남 집값을 잡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가의 자가보다 전세·월세살이 하는 이들의 주거 안정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되묻자,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했다. 자산 양극화는 분명 심각한 문제다. 또 집값 상승의 파도에 올라타지 못한 이들의 박탈감과 그로 인한 정권의 지지율 하락을 막고픈 바람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서민을 위한다는,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 정권 출범 초 전월세 시장 안정을 명분으로 권장했던 임대 사업자를 향한 규제를 강화하고 초고가 주택의 가격 상승 확산을 막는 데에 우선순위를 둔 건 모순이었다. 이런 방침이 외려 ‘똘똘한 한채’ 쏠림 현상을 가속화해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아파트를 포함한 수도권 주택 매매가격은 27.1% 뛰었다.

지난달 18일 이재명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는 심정이 복잡했다. “강남과 강남 외곽 지역의 집값 평탄화 작업이 진행되는 것 같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다. 이 말에는 서울 강남 집값이 약세를 보이는 것이 현 정부 정책의 ‘성과’라고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부가 챙기지 못한 빈틈은 크다. 월세 가격이 역대 정부에 견줘 이례적인 단기 급등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지난해 6월 현 정부 출범 후 지난 8월까지 1년3개월 사이 서울과 수도권 주택 매매가격은 각각 12.7%, 6.8% 올랐다. 서울 임차 시장만 놓고 보면 이 기간 전세가 8.3%, 월세는 8.1% 상승했다. 특히 월세 가격 오름폭은 과거 문재인·윤석열 정부의 8년간 누적 상승률인 5.1%를 이미 훌쩍 넘어섰다. 서울 강남 집값은 잡았을지 몰라도 정작 서민은 월세 급등에 신음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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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정책의 무게 중심을 ‘서울 강남 집값 잡기’에서 ‘서민 주거 안정’으로 옮기면 세부 정책 수단들도 달라질 수 있다. 서울 전월세 시장 불안의 뿌리엔 전세 사기 사태와 정부의 규제 강화 등으로 신축 공급이 씨가 마른 빌라가 있다. 2016년 연 5만가구를 넘었던 서울의 연립·다세대 등 비아파트 준공 규모는 지난해 5천가구를 간신히 넘겼다. 신규 입주 물량인 서울의 전체 준공 주택 수가 2023년 약 5만3천가구에서, 아파트 준공 물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4만7천가구로 줄어든 것은 비아파트의 공급 급감 때문이다. 대표 서민주택인 빌라 시장 정상화에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다.

현 정부에서 대폭 강화된 집주인의 실거주 의무도 재고해야 한다. 정의에 대한 성마른 신념이 현실의 사정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울 외곽에 살던 집주인이 자신의 서울 자가에 들어가면 임대차 매물이 줄어 세입자는 이삿짐을 싸야 한다. 정부가 연내 종료 예정이었던 토지거래허가구역 내 실거주 의무 유예 조처를 내년 말까지 연장하기로 한 것도 이런 부작용을 알고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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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정부를 지나며 최초의 다짐이 얼마나 무리했던 것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목표를 확 낮춰 잡았다. ‘월세를 살아도 불행하지 않은 세상’이 되도록 정부는 노력해야 한다. 서민 민생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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