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사회’에서 ‘술잔 피하는 사회’로 변화
고물가속 경기 둔화세가 이어지면서 최근 소비자들의 외식·여가 지출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뉴시스>
이 정도로 빨리 변할 줄은 몰랐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술 소비가 줄었다는 보도는 간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음주가무의 민족’인데 얼마나 술을 멀리 할까 싶었다. 하지만 술 소비 감소는 돌이킬 수 없는 트렌드가 돼버렸다.
도심 유흥가가 한산해졌고 대형 호프집들이 줄폐업이다. 주류회사들은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부어라 마셔라 하던 ‘술 권하는 사회’는 어느덧 옛말이 됐고 점점 ‘술잔 피하는 사회’가 되어 간다. 그 많던 술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밤 9시면 한산한 무교동 거리
밤풍경부터 확 달라졌다. 필자가 목격한 밤 9시 서울 무교동 거리는 낯설기까지 했다. 예전 같으면 퇴근한 직장인들로 북적였을 거리가 한산하다 못해 스산할 정도다. 불야성처럼 간판을 밝히던 음식점과 주점이 문을 닫거나 닫을 채비를 하는 탓이다. 8시 반쯤 마지막 주문을 마감하니 눈치가 보여 더 앉아 있기도 힘들다.
삼삼오오 1차를 끝내고 ‘한잔 더!’를 외치는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다. 식사를 겸한 모임 뒤 가볍게 커피를 마시거나 귀가를 서두른다. 10여년 전 삼성그룹이 시작한 ‘119(1차에 한 가지 술로 밤 9시에 종료)’ 절주 캠페인이 사회 풍조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직장인들의 칼칼해진 목을 달래주던 비어할레, 옥토버페스트 같은 대형 호프집들이 속속 폐업한 것도 달라진 음주문화를 대변한다. 끝까지 남았던 광화문, 종로2가, 무교동 일대 점포들마저 작년에 다 문을 닫았다. 직장인 단체 회식이 거의 사라졌고, 주52시간 근무로 칼퇴근 할 수 있게 돼 회사 주변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사라진 영향이 크다.
이런 변화는 주류산업에 연쇄적으로 파장을 미치고 있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칠성음료(주류부문)가 작년 4분기에 나란히 적자로 전환한 것이 상징적이다. 소주, 맥주가 잘 안 팔린다는 얘기다. 본업인 술을 팔아 이익을 못낼 판국이니 증시 활황에도 주가가 맥을 못 춘다. 황금알을 낳는다던 주류도매상들은 주 3일 안팎으로 단축 영업하고 공동배달로 비용절감에 부심한다고 한다. 인건비 유류비는 뛰는데 납품처인 주점·호프집이 5년 새 30% 줄었고, 가정용 수요는 편의점·마트로 넘어간 데 따른 고육책이다.
‘부어라 마셔라’에서 ‘헬시 플레저’로
한국 사회에서는 뭐든지 빠른 게 특징이지만 술 문화 변화는 눈이 핑핑 돌 지경이다. 2000년대만 해도 직장 회식은 ‘부어라 마셔라’하는 폭음 문화였다. 회식에 빠지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2차, 3차 달리고 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 중에서도 악명(?) 높던 것이 한 주류 대기업의 회식 풍경이었다. 자사의 술 20여종(소주, 맥주, 와인, 과실주, 위스키 등)을 양푼에 섞어 단체로 잔을 돌리며 ‘위하여~’를 외쳤다.
지금은 이런 강제회식이나 폭음 문화를 눈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그랬다가는 당장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할 것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에 이어 더욱 개인주의화 한 Z세대가 들어오면서 회식 자체가 대폭 줄었고 술 없는 송년회도 적지 않다.
MZ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은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집단보다 개인이 우선이고, 퇴근 후 간섭을 질색하며, 건강관리에 누구보다 열성적이다. 즐겁게 건강관리를 하자는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스스로 술을 줄이거나 끊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를 당연시한다.
사실 20~30대의 입장이면 100세를 살아야하기에 젊어서부터 재테크 못지않게 근(筋)테크가 중요하다. 그러니 퇴근 후 술자리 대신 헬스장, 필라테스장에 가 있거나 한강공원을 달린다. 더구나 술 말고도 즐길 수 있는 게 많다. 놀 거리, 불 거리가 다양해졌고 자기계발에도 신경 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가 아예 안 마시는 것은 아니다. 일명 핫플(핫 플레이스)로 꼽히는 홍대앞, 건대앞이나 주점이 몰려 있는 신논현역, 공덕역 주변을 보면 여전히 밤늦게까지 북적댄다. 모이는 곳에 더 모이고, 요즘 부쩍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몰려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확실히 ‘다르게’ 마신다. 빨리 취하는게 목적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마신다. 당연히 양보다 질을 중시한다. 소주, 맥주 대신 하이볼, 칵테일, 무알코올 맥주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1인 가구가 늘면서 혼술, 홈술도 많아졌다. 소주가 16도로 낮아진 것도 모자라 급기야 15.5도(진로골드)까지 등장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젊은피는 줄고 어르신은 늘고
한국인의 술 소비량은 교통사고 사망자 통계처럼 드라마틱하게 감소하고 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1인당 알코올(순수 알코올 기준) 소비량이 14.4리터에 달했다. 당시엔 경제낙관론과 흥청망청하는 분위기 속에 위스키 소비 증가율이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2023년에는 7.8리터까지 줄었다. 약 30년 새 절반 남짓한 수준이 된 것이다. 이는 OECD 회원국 평균 알콜 소비량(8.5리터)보다도 낮아. ‘주당민국’이란 오명도 이제는 떼야 할 판이다.
술 소비 감소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젊은층 음주 기피나 취향 변화 못지않게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가 ‘정해진 미래’를 예고한다. 한창 술을 마실 20~30대 인구는 갈수록 줄고 술을 기피하는 데다, 건강을 염려해 술을 자제하는 어르신은 점점 늘기 때문이다.
65세 이상 고령자가 1084만명으로 전체의 21.2%에 달한다. 60세 이상은 1450만명(28.3%), 55세 이상으로 넓히면 1840만명(35.9%)에 이른다. 반면에 현재 10~30대 인구를 다 합쳐도 1750만명(34.0%)에 그친다. 10년쯤 뒤에는 술 마실 인구보다 술을 자제할 인구가 더 많아진다는 얘기다.
술 없이 못 산다던 한국인이 술 없이도 잘 살게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전환 신호인 동시에 선진국형 라이프 스타일로 바뀌어가는 증거다. 과거 직장에선 주량이 능력이고 술 취해야 대화가 통하고 결속력이 강해진다고 여겼다면, 이제는 건강이 능력이고 맨정신에 프로답게 행동하며 각자 취향을 존중하는 분위기다. 음주문화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확실히 ‘집단적 야성’에서 ‘개인적 이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인사이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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