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시대에 서는 기념비
‘하나’ ‘모두’ 금빛으로 새긴들
세상의 갈등을 치유하는 건
랜드마크가 아니라 관용이다
미국 독립 250주년을 기념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워싱턴 DC에 건립을 추진하는 개선문의 조감도. /로이터 연합뉴스
빅토르 위고의 걸작 ‘파리의 노트르담’에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것’은 책(인쇄술), ‘저것’은 대성당이다. 시대적 배경은 구텐베르크가 활동했던 15세기 유럽. 그때까지 종교적 세계관을 감각 가능한 형태로 구현한 텍스트였던 대성당 건축은 활자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작품은 종지기와 집시 여인의 러브스토리에 앞서 사상의 전파 방식이 바뀌는 문명사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는 건국 250주년 기념 개선문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저것’이 시대를 거슬러 부활하는 듯한 위화감을 느낀다. 기능적 공간이 아닌 의미의 집합체로서 이만한 건축물이 들어선 사례가 21세기 들어 또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다수가 문맹자였던 시대에 대성당이 첨탑의 수직적 이미지로 인간의 신심을 형상화했다면, 벌써 ‘트럼프 아치’라는 별명을 얻은 개선문은 문자의 힘을 빌려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최근 공개된 계획안에 따르면 독수리 조각상으로 장식될 개선문 앞뒤에 ‘신 아래 하나의 나라(One Nation Under God)’ ‘모두를 위한 자유와 정의(Liberty and Justice for All)’ 문구가 금빛으로 새겨진다고 한다.
아이러니하다. 지금 미국은 그런 수사가 무색할 만큼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다. 지난달 뉴욕타임스 칼럼은 이렇게 지적했다. “양측(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은 서로를 너무나 증오해서 누가 누구를 더 증오하는지 묻는 일 자체가 거의 무의미하다.” 양대 정당뿐 아니라 트럼프 지지층 매가(MAGA) 진영 내부에서도 이란 전쟁을 비롯한 현안을 둘러싸고 갈등이 분출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념, 세대, 성별, 지역을 경계로 갈라선 사람들이 주고받는 언사는 섬뜩하다. ‘국민’이라는 공동체가 과연 존속할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들 정도다. 분열은 오늘날 세계적 현상이다. 많은 전문가가 소셜미디어의 확증 편향을 양극화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AI(인공지능) 발전으로 정교해진 가짜 뉴스가 이를 부채질한다. 개인이 분열하고, 진영이 분열하고, 동맹이 분열한다. 개선문은 미국에 들어서지만 분열이라는 시대정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세계적이다.
개선문 건립 예정지는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에서 다리 하나를 건넌 곳이다. 건국 250주년을 상징하는 250피트(약 76m) 높이를 가늠할 때도 링컨 기념관(99피트)이 비교 대상으로 거론된다. 링컨은 내전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분열과 싸웠던 대통령이다. 암살당하던 순간 그가 입고 있던 코트 안감에는 미국의 상징 독수리 문양과 함께 ‘하나의 국가, 하나의 운명(One Country, One Destiny)’이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색실로 수놓은 게 아니라 검은 실크에 누비듯 바느질한 것이어서 자세히 보기 전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링컨은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통합의 책무를 되새겼을 것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워싱턴포스트 건축 평론가 필립 케니코트는 개선문 계획안을 다룬 칼럼에서 남북전쟁의 종식을 알린 역사적 장면을 언급했다. “1865년 4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해군 병사 여남은 명과 함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부연합 수도) 리치먼드에 입성했다. 그것은 퍼레이드가 아니었다. 패배한 남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들을 관대하게 대하라’고 답했다.”
승리가 아니라 관용이 분열을 치유한다. 트럼프가 이 시대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거대한 개선문을 세우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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