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이어서 더 따뜻한 결정, 연명의료의향서
한때 범죄였던 선택이 ‘나의 권리’가 되기까지...
행복학교 회원들이 '웰다잉이란 무엇일까요?' 를 주제로 한 강의를 듣고 있다. (교장쌤의 행복학교 유튜브 캡처)
어느 ‘웰다잉’ 수업의 기록…빛나는 어른들의 결정
“웰빙(Well-being)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그렇다면 웰다잉(Well-dying)은 준비하셨나요?”
어버이날을 앞둔 최근 서울의 한 공유 오피스 회의실. 이곳의 분위기는 여느 대학가의 스타트업 미팅 현장처럼 활기가 넘친다. 비영리 모임 ‘행복학교’의 회원들이 모이는 현장이다. 이날은 국내 연명의료를 총괄한 경험이 있는 조정숙 전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본부장이 강사로 나서 불쑥 '웰다잉'을 준비했느냐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행복학교는 퇴임한 교장 선생님을 중심으로 ‘자식들이 롤모델로 삼고 싶은 멋진 어른’이 되자는 취지로 시작된 모임이다. 50대부터 70대까지 골고루 섞인 이들에게 나이는 그저 쌓여온 숫자일 뿐이다. 배움과 성장을 향한 열정만큼은 20대의 그것을 가뿐히 넘어선다. 함께 AI를 배우며 수업용 브로셔를 만들고, 유튜브 영상까지 직접 제작한다. '시니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이곳에 모인 이들은 실제 나이보다 열 살 이상은 젊어 보이는 세련된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 건강한 공동체가 선택한 이날의 주제가 ‘연명의료결정제도’였다. 웰다잉은 육체적 생명의 아름다운 마무리, 사회적 관계의 아름다운 마무리, 그리고 물리적 유산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존엄하고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이 큰 의미를 갖는다.
조 전 본부장에 따르면 2026년 3월 기준, 65세 이상 어르신 중 23%가 넘는 인원이 이미 연명의료의향서를 제출했다. 대리 신청이 불가능해 본인이 직접 움직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많은 참여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초고령 사회 진입 속도가 유례없이 빠르기도 하지만, 전국 어디서나 신청이 가능한 접근성 좋은 구조를 만든 게 연명의료의향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연명치료 중단은 한때 범죄로 취급받았다. 1997년 보라매병원에서 의료진이 병원비 부담을 느낀 가족의 지속적 요청으로 환자를 퇴원시켰다가 사망하자 살인방조죄가 적용된 사례가 있었다. 이후 의사들은 법적 책임을 우려해 고통을 끝내고 싶은 당사자와 가족들의 간절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연명의료 중단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8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연명치료 중단이 다시 화두가 되었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2018년에야 비로소 환자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을 결정할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김 할머니 사건은 폐렴 증세로 입원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자 김 할머니 가족이 생전의 뜻을 근거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지' 소송을 내 승소하면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사례다. 당시 법원은 "환자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제도 시행 이후, 연명의료의향서 제출자 100만 명을 달성하는 데 3년 넘게 걸렸던 시간이 이제는 1년 남짓이면 100만 명씩 늘어날 만큼 속도가 붙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연명의료중단의향서'가 맞지만, '연명의료중단'이 갖는 부정적 의미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도 '중단'이라는 단어를 빼고 '연명의료의향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금은 부정적 이미지도 많이 희석돼 임종을 앞둔 이들 뿐만 아니라, 부모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깊은 고민을 해온 중장년층까지도 이 ‘존엄한 서약’에 동참하고 있다.
행복학교 회원들이 연명의료의향서 작성전에 설명을 듣고 있다. (교장쌤의 행복학교 유튜브 캡처)
내 삶의 마지막, 나는 어떻게 떠나고 싶은가?
행복학교는 ‘죽음’을 준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으로서 이 강의를 준비했다고 했다. 무조건 붙잡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편안히 보내드리는 용기 또한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삶을 내가 직접 선택하고 존엄하게 마무리할 권리'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날 강의를 지켜보며 풀무원 식품을 창업한 원혜영 전 민주당 의원의 저서 <마지막 이기적 결정>이 떠올랐다.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나의 마지막은 결국 자식들의 눈물 섞인 갈등으로 남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혹한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연명의료의향서 작성 결정의 근원은 결국 ‘나의 존엄을 내 손으로 끝까지 지키겠다’는 단단한 의지다. 여기서 ‘이기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내 삶의 마무리를 타인의 손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강력한 자존감의 표현인 셈이다.
강의가 끝난 뒤 의향서 작성이 시작됐다. 현장에 있던 20명의 참석자 중 이미 작성한 분과 숙고가 필요한 한 분을 제외한 18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취재차 방문했던 필자 또한 깊이 공감하여 기꺼이 펜을 들었다. 서류 작성을 마친 이들은 “이렇게 좋은 제도를 이제야 알았다”며 배우자도 동참시키겠다는 소회를 전하기도 했다.
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위해 행복학교 회원들이 신분증을 제시하고 본인 의사를 밝히는 과정. (유튜브 교장썜의 행복학교 캡처)
죽음을 준비한 사람들이 사는 ‘눈부신 오늘’
주체적인 죽음을 약속한 행복학교 멤버들은 이 뜻깊은 결정을 내린 뒤, 또 다른 행복을 찾아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화가로 변신한 배우 박신양의 전시 <제4의 벽>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전시장 벽면에 적힌 “예술을 한다는 것… 그것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일입니다”라는 문구 앞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내 삶의 마무리를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서약한 직후, 삶을 질문하는 예술을 마주한 이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죽음을 준비함으로써 오히려 남은 생의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끝을 명확히 인지할 때, 오늘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상은 더 또렷해진다. 행복학교 회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오후의 시간을 촘촘히 느끼며 진한 활력을 얻은 듯 보였다. 죽음을 자존감 있게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건강한 일상은 너무나 소중하다. 행복학교 어르신들과 꽉 찬 하루를 함께하고 나니, 행복은 막연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삶의 마지막에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행복학교에서 만난 연명의료제도는 죽음을 준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나의 삶을 내가 선택하고 존엄을 지키며 마무리할 수 있는 권리. 오늘 우리는 ‘잘 사는 것’을 넘어 ‘잘 떠나는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봅니다.” (행복학교 유튜브 영상 메시지 중에서)
※ 알아두면 유익한 정보
▲ 사전연명의료의향서: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작성 가능하며, 향후 임종 과정에 있을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의향서.
▲신청 방법: 신분증 지참 후 가까운 보건소나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지정 등록기관을 방문하면 된다. (대리 작성 불가)
▲상담 문의: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1855-0075. (끝번호 네자리 '0075'는 '연명치료'라는 발음에서 착안한 것이다.)
▲행복학교: 배움과 나눔을 통해 시니어의 새로운 롤모델을 제시하는 비영리 공동체. (유튜브 채널: 교장쌤의 행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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