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세계 경제가 혼란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원유와 가스뿐 아니라 알루미늄·요소·헬륨 등 원자재 가격까지 폭등하고 있어 반도체·자동차·가전 등 제조 기반의 국내 수출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알루미늄 4년 만에 최고가…항공기·자동차·가전 등에 타격
트레이딩 이코노믹스(TRADING ECONOMICS)에 따르면 중동 분쟁 발발 직후 원유, 가스 등 에너지 가격이 폭등한 데 이어 주요 원자재 가격도 급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먼저 가격이 오른 원자재는 알루미늄이다. 알루미늄은 지난 9일 근 4년 만에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13일 기준으로는 톤당 3500달러를 상회하며 전월 대비 13.68% 상승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화물 선적이 어려워지자 카타르와 바레인에 있는 주요 제련소에서 알루미늄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국제알루미늄협회(IAI)에 따르면 이 지역 생산국들은 지난해 전 세계 알루미늄의 약 8%를 공급했다.
알루미늄은 항공기, 자동차 부품, 가전·IT 기기, 음료 캔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 활용되는 핵심 금속이다. 가격 상승세가 이어질 경우 해당 산업에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알루미늄. 사진=셔터스톡
요소 최대 35% 급등…농업·화물 우려
요소 가격은 전쟁 발발 이후 최대 35%까지 급등했다. 12일 기준 전월 대비 33.78% 상승한 톤당 594달러를 기록했다.
물류 산업에 타격이 예상된다. 국내 화물차 중 디젤차 비율이 90%에 육박하던 2018년 이후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디젤차 비율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나 여전히 절반 이상의 화물차는 디젤차량으로 집계된다. 따라서 수출용 컨테이너 운송, 신선식품·택배 배송 등 육상 물류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LPG나 전기로 대체할 수 없는 건설 장비의 경우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굴삭기, 덤프트럭, 레미콘 등 건설 기계 대부분은 디젤 엔진을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이미 2021년경 ‘요소수 대란’을 겪은 바 있다. 당시 국내 유통 요소수의 대부분을 중국 수입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중국과 호주 간 갈등으로 공급이 급감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후 정부는 중국산 요소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중동·유럽 등 수입처를 다변화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중동 사태로 요소 가격 폭등과 품귀 현상 등 요소수 대란 당시의 혼란이 재발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동 사태로 요소와 인산 등의 수급이 어려워지며 화학 비료 가격이 급등하는 가운데 지난 10일 고양 한 농자재 센터에 요소 비료가 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헬륨 생산·공급 중단…반도체 기업 어쩌나
헬륨 공급에도 차질이 빚어질 전망이다. 카타르는 지난해 전 세계 헬륨 공급량의 3분의 1을 생산했다. 미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헬륨 생산국이다.
골드인베스트(GOLDINVEST)에 따르면 카타르 라스라판 산업단지에 위치한 카타르에너지의 액화천연가스(LNG) 공장이 지난 2일 생산을 중단했다. 사드 셰리다 알-카아비 카타르에너지 CEO는 분쟁이 완전히 끝난 후 생산을 재개한다는 뜻을 밝혔다.
헬륨은 LNG를 액화하는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어 LNG 생산 중단은 헬륨 공급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골드인베스트에 따르면 해협 봉쇄가 풀려 생산이 재개된 후에도 컨테이너 재배치·물류 정상화 등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헬륨 공급 위기를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다만 비축분으로 인해 실제 공급 부족 현상은 몇 주 뒤에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시장은 실제 가용성보다는 미래의 희소성에 다 빠르게 반응했다. 12일 로이터 통신은 중동 사태 이후 헬륨 현물 가격이 두 배 올랐다고 보도했다. 콘블루스 헬륨 컨설팅(Kornbluth Helium Consulting)에 따르면 헬륨을 핵심 원료로 사용하는 일부 기업들이 공급 위기에 대비해 헬륨 확보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난항이 예상된다. 헬륨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수 재료이기 때문이다. 웨이퍼를 냉각하고 초미세 공정에서 불활성 환경을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헬륨 수급 상황을 긴급 점검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헬륨 재활용 시스템 확대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호주산 대체, 러시아 공급선 확보 가능성도 타진하고 있다.
에탄올·설탕 등 줄줄이 인상…의료·식품 업계도 고심
에탄올은 지난 11일 기준 갤런당 1.875달러 수준으로 전월 대비 10.29% 상승했다. 특히 에탄올은 석유를 대체해 차량 연료로 사용될 수 있어 유가가 폭등하면 에탄올에 수요가 몰린다. 앞선 유가 폭등에 호르무즈발 공급 위기까지 겹쳐 에탄올 가격이 급등했다.
그 외에도 의료 산업에 필수적인 원자재로 의약품 추출에 사용되거나 의료 기기 소독 등에 사용된다. 화장품 산업과 식품·주류 산업에도 널리 쓰여 관련 기업들의 원가 부담이 예상된다.
설탕은 12일 기준 파운드당 14.38달러를 기록했다. 전월 대비 6.18% 상승했다.
사탕수수나 옥수수에서 추출한 즙을 정제하면 설탕이 되고 당밀을 발효시키면 에탄올이 된다. 사탕수수 생산국들은 공장에서 설탕을 만들지 에탄올을 만들지 매일 가격을 확인한 후 결정한다.
지금처럼 기름값이 비싸면 연료용 에탄올 수요가 증가해 설탕 대신 에탄올을 더 많이 생산한다. 결국 설탕 생산이 감소해 설탕 가격이 상승하게 된다.
현재는 공급망 위기에 따라 에탄올 수요가 생산량을 웃돌아 에탄올 가격 상승폭이 설탕 가격을 앞지르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탕수수가 에탄올 생산에 쏠리는 현상이 지속되면 설탕 생산 비중이 줄어들어 수급 불균형에 따른 급격한 가격 상승이 우려된다.
지난 2월 12일 서울시내 한 대형마트에 설탕이 진열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번 중동 사태로 촉발된 원자재 가격 급등은 원자재 자급률은 낮고 수출 의존도는 높은 국내 제조 기업들에게 직격탄이 될 것으로 전망돼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
이정희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전쟁이 장기전이 될지 단기전이 될지 알 수 없어서 대응 전략을 결정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단기적으로는 재고가 있어 큰 문제가 없을 수 있는데 길어지는 경우가 문제”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중동 수입 비중이 높은 원자재는 중동 이외의 수입처를 찾으면서 수입을 늘리는 방안을 최대한 검토해야 한다”며 “기업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부가 협력해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플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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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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