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옥상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저쪽에서는 무언가가 깊게 흐르고 있었다. 섣불리 다가가 말을 걸면 그 사람을 에워싼 고요한 음악이 바스러질 것 같아 가만히 발걸음을 돌렸다.
오후에 마주쳤을 때 넌지시 물었다. 점심도 거르고 음악을 듣던데 무슨 일이냐고. 그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일 아니라고 했다. 잠시 뒤 메신저로 플레이리스트 하나가 도착했다. 열한 곡 남짓한 클래식 피아노곡, 연주자도 시대도 제각각이었지만 선곡의 흐름은 절묘했다. 평소 선호하지 않던 피아니스트의 연주도 섞여 있었으나 앞뒤 곡 사이에서 묘하게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첫 소절만 듣고 건너뛰었을 트랙이 그 배치 안에서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어떤 기준으로 골랐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알고리즘 추천’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괜찮다’는 말과 ‘알고리즘’이라는 대답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오늘의 스트리밍 플랫폼은 듣기 좋은 흐름을 만드는 데 놀라울 만큼 능숙하다. 불편한 곡은 덜어내고, 설명이 필요한 대목은 건너뛴다. 말러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가 아름다운 것은 그 앞선 악장들의 그림자를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성립하는 것인데, 플레이리스트에서는 그 긴 여정이 생략된 채 잔잔하고 서정적인 곡으로 소비되기 쉽다. 최근에는 기분이나 상황을 입력하면 AI가 알아서 선곡하는 기능까지 일상이 되었다. 무드만 남기고 맥락은 지우는 방식이다.
우리의 사회생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대개 지금 괜찮다고 말한다. 설명하기 번거로운 사정은 접어두고 상대가 듣기 편한 부분만 내놓는다. 그렇게 내보내는 것은 삶의 전곡이 아니라 잘 정리된 하이라이트에 가깝다.
다만, 누군가가 진심을 담아 곡을 고를 때 그 순서에는 다른 밀도가 생긴다. 왜 이 곡 다음에 저 곡이어야 하는지, 그 생각이 배열에 밴다. 일부 플랫폼에서는 연주자가 사랑하는 타인의 연주를 골라 배열한 큐레이션 목록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나열이 아니라 짧은 에세이에 가깝다. 클래식 음악은 오래전부터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회’라는 형식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는 한 저녁의 곡 순서를 설계하는 최초의 큐레이터였다. 이후 지휘자들이 프로그램 배치를 두고 밤을 지새운 것도 같은 이유다. 그 순서에는 무드가 아니라 숨겨진 맥락이 흐르곤 한다.
프랑스·호주 연구팀이 스트리밍 구독자 1만명의 청취 이력을 분석한 결과는 흥미롭다. 취향에 맞는 숨은 곡을 찾아내 반복 청취를 이끄는 건 알고리즘이 우세했지만, 완전히 낯선 연주자의 음악에 처음 마음을 열게 한 것은 사람의 큐레이션이었다. 익숙한 길은 기계가 잘 찾지만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건 사람의 몫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패턴을 넘어 낯선 타인에게 다가가는 첫걸음은 결코 알고리즘이 대신해 줄 수 없다.타인과 온전히 교감을 나누는 과정 역시 이와 닮아 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더라도, 한 곡씩 건네듯 천천히 자신을 내어놓는 사이. 느린 악장에도 함께 머물고, 불안한 전개부도 건너뛰지 않는 관계 안에서 시간은 음악같이 흐르곤 한다.
그날 옥상에서의 뒷모습을 가끔 떠올린다. 아무 일 아니라고 했지만, 그가 보내온 목록에는 걸음이 느리고 귓가를 오래 맴도는 곡들만 놓여 있었다. 발걸음을 돌리는 대신 가만히 옆에 앉았더라면, 재생목록이 아니라 그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듣지 못한 이야기가,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옥상 어딘가에서 아직 고요히 맴돌고 있을 것 같다.
글·사진=이상권 음악평론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