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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수요칼럼] 은행이 지켜야 할 것은 돈만이 아니다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몇 번의 터치만으로 송금이 완료되고 대출 승인이 떨어진다. 손가락 하나로 모든 금융 거래가 해결되는 편리함은 이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수요칼럼] 은행이 지켜야 할 것은 돈만이 아니다

이충원 대구가톨릭대 연구교수·인간공학박사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몇 번의 터치만으로 송금이 완료되고 대출 승인이 떨어진다. 손가락 하나로 모든 금융 거래가 해결되는 편리함은 이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번거로운 서류 제출이나 창구 방문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자금을 움직일 수 있는 디지털 금융의 시대는 우리에게 유례없는 효율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눈부신 기술 혁신의 그늘 뒤편에서 우리의 일상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새로운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최근 주요 금융회사들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고는,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편리함 뒤편이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사태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사이버 공격의 기술적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금융당국과 보안업계의 조사를 통해 AI 기반의 자율 침투 도구가 악용된 정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시스템의 취약점을 찾아내고 공격 코드를 작성하려면 상당한 기술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AI 에이전트가 방대한 소스코드의 취약점을 단 몇 시간 만에 탐색하고 공격 과정을 빠르게 보조하거나 자동화하기 시작하면서 보안의 판도가 달라지고 있다.

공격자의 부족한 기술력과 경험을 AI가 상당 부분 보완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AI 시대가 가져온 가장 무서운 변화는 기술의 화려함이 아니다. 기술의 진입장벽이 무너지면서 평범한 공격자조차도 강력한 전문 해커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술 발전이 아이러니하게도 해킹의 문턱과 범죄 실행 비용을 대폭 낮추어 버린 셈이다.

실제로 올해 들어 한국은행과 주요 국책은행 등 국가 금융의 핵심 기관들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 시도만 102만 건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다행히 이들 핵심 국책 기관에서는 실제 데이터 침해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민간 금융권에서 고객 정보가 속속 유출된 이번 사태는 금융 보안의 거대한 제방에 이미 미세한 균열이 시작되었음을 방증한다.

여기서 우리는 금융회사들의 책임과 사회적 의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은행은 단지 현금을 보관하는 단순한 금고가 아니다. 우리는 은행에 지갑 속 현금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주민등록번호, 소득, 신용등급, 대출한도, 자산 현황과 일상적 거래 내역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경제적 신원 전체를 통째로 맡기고 있다. 유출된 금융 앱 비밀번호나 보안카드는 몇 번의 클릭으로 즉시 변경하면 그만이지만, 이미 노출되어 버린 개인의 소득 수준과 신용정보, 삶의 궤적이 담긴 금융 기록은 비밀번호처럼 교체할 수 없다.

그동안 국내 금융회사들은 디지털 전환을 앞세워 치열한 서비스 경쟁을 벌여왔다. 앱은 날로 화려해졌고, AI 상담원이 등장했으며, 대출 및 계좌 개설 절차는 단 몇 분 단위로 단축되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금융회사들은 편리함과 서비스 혁신에 쏟은 관심만큼, 그 소중한 개인정보와 자산을 지키는 방어력을 핵심 경영과제로 다뤄왔는가.

공격하는 해커는 수천 번을 실패하더라도 단 한 번만 성공하면 목적을 달성하지만, 수백수천만 명의 소중한 정보를 쥐고 있는 금융회사는 단 한 번의 방심으로도 회복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는다. 이 압도적인 책임과 위험의 비대칭성 앞에서도, 금융권이 그동안 보안 관련 투자를 소홀히 여겨온 것은 아닌지 뼈아프게 돌이켜봐야 한다.

디지털 금융 생태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경쟁력은 더 빠른 송금 속도도, 더 똑똑한 AI 자동화 시스템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자산과 인격이나 다름없는 개인정보가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흔들림 없는 사회적 믿음이다. 무분별하게 발전한 AI 기술이 공격의 문턱을 한없이 낮춰버린 시대라면, 고객의 삶을 담보로 영업하는 금융회사는 그보다 훨씬 높고 견고한 보안과 신뢰의 문턱을 세워야 마땅하다.

금융의 본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오직 하나, ‘신뢰’다. 은행이 지켜야 할 것은 금고 속 돈만이 아니라, 그 돈에 얽힌 개인의 존엄한 삶과 우리 사회의 신뢰 자산 전체다. 이 명확한 본질을 망각한 편리함은 언젠가 더 큰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연쇄 유출 사태는 묵직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충원 대구가톨릭대 연구교수·인간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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