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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송두율 칼럼]기술입국 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는 몇 차례의 큰 도약을 경험했다. 1960~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앞세워 산업화를 추진했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는 정보화를 국가적 생존전략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IT 강국’이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한국이 AI 강국이 될 수 있는가만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강한 나라가 곧 좋은 사회인가다

기술을 지배하는 사회와 기술에 지배되는 사회의 차이는

AI를 얼마나 빨리 개발하고 많이 확보하느냐에 있지 않다

그 차이는 기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를

무엇으로 바라보며, 누가 그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느냐에 있다

한국 현대사는 몇 차례의 큰 도약을 경험했다. 1960~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앞세워 산업화를 추진했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는 정보화를 국가적 생존전략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IT 강국’이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이제 반도체, 물리적 AI,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한 ‘3대 메가프로젝트’가 또 하나의 국가적 도약으로 제시되고 있다. ‘AI 강국’을 통해 ‘대체불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표어는 산업입국에서 IT 강국, 다시 AI 강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밑에는 하나의 오래된 믿음이 흐르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 경제가 성장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국가가 강해지고, 결국 사회 전체가 발전한다는 믿음이다. 이를 넓은 의미에서 ‘기술입국’의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지난 6월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삼성의 이재용 회장이 서로 90도 인사를 나누고, 그 뒤에서 SK의 최태원 회장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나는 산업화 과정에서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이 함께했던 여러 장면을 떠올렸다.

물론 오늘의 AI 정책을 과거의 중화학공업 정책이나 정보화 정책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국제환경도 다르고 기술의 성격도 크게 달라졌다.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대하고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며 휴머노이드 로봇과 물리적 AI를 산업현장에 활용하는 일은 한국 경제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AI가 세계 산업질서를 바꾸는 상황에서 한국만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 있을 수도 없다.

문제는 기술개발 자체가 아니다. 기술이 어느 순간 사회가 나아갈 방향까지 대신 결정하기 시작할 때 문제가 생긴다. ‘AI 3대 강국’ ‘추격’ ‘메가프로젝트’라는 표현에는 국제경쟁에서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담겨 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우리는 ‘얼마나 빨리 따라잡을 것인가’ ‘얼마나 많이 투자할 것인가’를 먼저 묻게 된다.

기술입국의 논리에 밀린 질문들

그러나 기술입국의 논리가 강해질수록 더 근본적인 질문은 뒤로 밀릴 수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려는가. 이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기술발전으로 생겨나는 이익과 비용은 누가 나누어 갖는가. 그리고 누가 기술의 방향을 결정하는가.

AI 시대에는 이러한 질문이 더욱 현실적이다. 인간의 소비, 이동, 검색, 대화와 같은 경험은 점점 데이터로 바뀌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선택할지도 알고리즘이 예측한다. 지식뿐 아니라 인간의 판단까지도 점차 기계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이해했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현대 기술에서 경계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변화였다. 기술의 위험은 기계 그 자체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계산하고 동원할 수 있는 ‘가용 자원’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자연과 인간의 노동이 자원이 되었던 산업시대를 넘어, AI 시대에는 인간의 경험과 취향, 기억과 판단까지 데이터라는 자원으로 편입되고 있다.

그러나 AI는 흔히 생각하듯 데이터와 알고리즘만으로 이루어진 비물질적 기술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막대한 전력과 물을 소비하는 데이터센터와 발전소, 송전망, 냉각시설, 그리고 토지가 있다. 흔히 데이터센터를 ‘AI 시대의 고속도로’라고 부르지만, 경부고속도로가 단순한 토목시설이 아니었듯 데이터센터 역시 단순한 기술시설이 아니다. 어디에 건설할 것인지, 필요한 전력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 그 비용과 환경적 부담을 누가 떠안을 것인지, 그리고 경제적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사회적·정치적 공간이다.

이 문제는 한국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미국과 중국에 맞서 ‘디지털 주권’을 내세워 AI 인프라를 확대하는 유럽에서도 데이터센터의 전력과 물 사용, 지역사회의 결정권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데이터센터의 막대한 전력소비가 전력망을 둘러싼 정치 문제가 되었고, 스페인에서는 물 부족 우려가 큰 아라곤 지역의 데이터센터 건설을 둘러싸고 주민과 시민단체의 반발이 일어났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주민들이 대형 데이터센터 건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AI 인프라도 결국 민주적 결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올해 3월에 별세한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오래전에 제기했던 ‘이데올로기로서의 기술과 과학’이라는 문제가 떠오른다. 원래 사회적 숙의를 통해 토론하고 선택해야 할 문제를 어느 순간 ‘기술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다’거나 ‘경제적으로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다’라고 설명하기 시작하면 시민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든다. 전문가와 기업, 관료가 ‘기술적으로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순간 논쟁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술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정치적 선택이 숨어 있다. 기술적 합리성이 사회적 합리성 전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문제 제기였다.

AI 시대엔 강한 시민사회 필요

가령 수백조원이 들어갈 AI 인프라를 어느 지역에 집중할 것인가. AI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 생산성이 높아졌을 때 그 성과를 기업과 주주가 대부분 가져갈 것인가, 노동자와 사회 전체가 함께 나눌 것인가. 우리가 매일 만들어내는 방대한 데이터는 누구의 소유인가. 사람들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알고리즘은 누가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컴퓨터의 계산만으로 답할 수 없다. 결국 분배와 권력, 민주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는 자본과 기술을 특정 산업에 집중시키면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정보화 과정에서도 국가와 대기업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AI 시대에도 정부와 대기업이 힘을 모아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가 큰 것은 자연스럽다. 이번 메가프로젝트에서도 국가가 전략산업을 선정하고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결합해 국가적 도약을 추구한다는 개발주의적 상상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반복할 수 있을지는 따져봐야 한다. 오늘날 AI 산업에서 기술과 자본, 데이터의 집중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몇몇 거대기업이 데이터와 알고리즘, 컴퓨팅 능력을 동시에 장악할 가능성도 커졌다. 국가가 이러한 기술기업과 거대자본의 요구를 지원하는 역할에만 머문다면 국가는 기술적으로 강해질지 모르지만, 시민이 기술의 방향을 결정할 힘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강한 국가만큼이나 강한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기술은 미래를 여는 강력한 수단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까지 스스로 결정해주지는 않는다.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어떤 사회를 만드는 데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산업입국에서 IT 강국을 거쳐 AI 강국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를 움직여온 기술입국의 열망은 실제로 경제발전의 강력한 동력이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정당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술적 경쟁력이 곧 국가의 발전이고, 그 경쟁에서 앞서가는 일이 다른 사회적 목표보다 우선한다는 믿음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기술입국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한국이 AI 강국이 될 수 있는가만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강한 나라가 곧 좋은 사회인가. 기술을 지배하는 사회와 기술에 지배되는 사회의 차이는 AI를 얼마나 빨리 개발하고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 있지 않다. 그 차이는 기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를 무엇으로 바라보며, 누가 그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느냐에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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