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I 기흥 본사 (사진=삼성SDI)
| 이코노미사이언스 정연재 기자 |
국내 배터리 업계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과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라는 이중 압박에 놓인 가운데, 삼성SDI가 실적 부진 속에서도 기술과 수주 양축에서 반전의 실마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5년에는 매출 감소와 수익성 악화를 겪었지만, 최근 북미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서 대형 수주를 연이어 확보하고 전고체·46파이·리튬메탈 등 차세대 배터리 개발도 구체화하면서 다음 사이클을 겨냥한 준비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SDI의 2025년 연결 매출은 13조 2667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까지 이어지던 흑자 흐름에서 적자로 전환되며 업황 변화를 그대로 반영했다. 실적만 놓고 보면 부담이 적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를 단순한 부진으로만 보기보다, 전기차 중심 시장이 ESS와 AI 인프라, 차세대 배터리로 확장되는 전환 국면에서 나타난 비용 부담과 구조 조정의 결과로 해석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실제 삼성SDI의 최근 행보를 보면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 방향은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ESS 수주다. 삼성SDI는 최근 북미 에너지 인프라 기업들을 대상으로 대형 ESS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잇따라 체결하며 판로를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공급 제품도 기존 주력인 NCA뿐 아니라 LFP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는 삼성SDI가 삼원계 중심 회사라는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ESS 시장에 맞는 제품 포트폴리오를 빠르게 넓히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삼성SDI의 미국 생산 ESS용 배터리 (사진=삼성SDI)
더 주목되는 대목은 이 수주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삼성SDI는 북미에서 비중국계 각형 ESS용 배터리 생산체제를 기반으로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스타플러스에너지(SPE) 공장을 거점으로 NCA와 LFP를 순차 생산하는 구조를 갖춰가고 있으며, 현지 시장 수요 변화에 맞춰 전기차용 라인을 ESS용으로 전환하는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전력 인프라 수요가 커지는 가운데, ESS는 더 이상 보조 시장이 아니라 독립 성장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삼성SDI의 최근 수주 흐름은 의미가 작지 않다.
공급망 측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삼성SDI는 최근 LFP 양극재 중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소재 조달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소재 확보를 넘어 북미 ESS 시장 공략을 위한 탈중국 공급망 구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LFP 양극재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국내 공급선을 확보했다는 점은 향후 미국 시장 내 규제 대응과 고객 신뢰 확보 측면에서 경쟁사 대비 유리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
기술 쪽에서도 삼성SDI의 강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회사는 2027년 전고체 배터리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파일럿 라인 구축 이후 고객사 대상 샘플 공급까지 진행된 상태다. 즉 전고체가 단순한 연구 단계가 아니라, 고객 검증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국내 배터리 업계 최초로 46파이 원통형 배터리 양산에도 돌입했다. 삼성SDI는 기존 대비 에너지 용량을 크게 높인 차세대 원통형 제품을 이미 확보된 해외 고객사에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차세대 기술 저변도 넓다. 삼성SDI는 리튬메탈 배터리 분야에서도 글로벌 공동연구를 통해 수명과 안전성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는 기술적 돌파구를 확보했다. 전고체, 리튬메탈, 나트륨 배터리까지 이어지는 연구개발 축은 회사가 단기 실적 방어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음 시장을 위한 기술 자산을 계속 축적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연구개발 투자 규모도 이를 뒷받침한다. 삼성SDI의 연구개발비는 1조원대를 유지하며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누적 특허 등록 건수 역시 2만 건을 넘어섰다. 회사는 각형, 전고체, 소재·공정 기술 전반에서 특허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고 있으며, 생산·품질 데이터를 통합한 데이터 플랫폼 구축과 AI·디지털 트윈 적용도 병행하고 있다. 단기 실적보다 장기 경쟁력에 무게를 둔 투자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삼성SDI 제 56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발언하는 최주선 대표이사 (사진=삼성SDI)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주주총회에서도 재확인됐다. 최주선 대표이사 사장은 올해를 실적 턴어라운드의 원년으로 삼겠다며 하반기 분기 흑자 전환을 목표로 제시했다. 특히 “결국 답은 기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전고체를 비롯해 나트륨, 리튬메탈 배터리 등 차세대 기술과 함께 ESS, 로봇 등으로 수주를 확대해 나가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이는 단기 실적 개선을 넘어 기술과 포트폴리오 중심의 구조 전환을 통해 중장기 성장 기반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물론 과제도 남아 있다. 삼성SDI가 확보한 수주와 기술 자산이 실제 매출과 수익성 개선으로 연결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ESS 시장 확대가 전기차 부진을 얼마나 상쇄할 수 있을지, LFP 제품이 북미 시장에서 얼마나 빠르게 안착할 수 있을지도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삼성SDI를 단순히 “실적이 나쁜 회사”로만 보기는 어렵다. 현재 실적 기준으로는 가장 힘든 구간에 있지만, 전략 기준으로는 오히려 방향이 가장 선명한 회사에 가깝기 때문이다. 북미 ESS 대형 수주 흐름, 비중국 공급망 확보, 전고체와 차세대 배터리 개발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삼성SDI가 다음 배터리 시장을 어떤 방식으로 돌파하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파느냐보다 어떤 시장 구조에 먼저 올라타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점”이라며 “삼성SDI는 실적 부담이 큰 대신 기술과 고부가 시장 쪽에서 준비된 카드가 분명한 회사”라고 말했다.
결국 삼성SDI의 승부는 현재 적자 규모보다, ESS와 차세대 배터리에서 쌓아온 기술과 수주를 얼마나 빠르게 실적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실적은 바닥권에 머물러 있지만, 기술과 수주는 이미 다음 사이클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시장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아주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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