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탈미술관은 우리나라 등록 사립미술관 1호로, 한국 현대미술의 산실로 재리매김해왔다. 사진은 노준의 토탈미술관장.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문신규 건축가의 글.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평온한 5월의 주말, 서울에서 기가 가장 센 바위동네 평창동의 '토탈미술관(관장 노준의·80)'을 찾았다.
이곳에서 올해 한불(한-프랑스)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4월 30일부터 5월 31일까지 한달간 열리는 전시회(전시명: Catherine & Renato CASCIANI: Somebody has to collect it)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 릴(Lille)을 기반으로 30여 년간 비디오 아트와 동시대 예술을 수집해온 카트린 & 레나토 카시아니 부부의 컬렉션을 비롯해 클레망 코지토르, 베르티유 바크 등 프랑스 현대 미술의 최전선에 있는 영상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선보였다.
전시 관람 후 노준의 관장의 안내로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는데, 책상 위에 놓인 하얀 종이에 정갈하면서도 힘 있게 휘갈겨 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죽음 앞에 서야 비로소 삶이 얼마나 찬란한 선물이었는지 깨닫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요, 큰 아쉬움일 수도 있겠다."
이 문장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현대 건축과 예술계의 거목, 문신규 건축가(88)다. 노준의 토탈미술관 관장의 남편이자, 한국 최초의 사설 미술관인 토탈미술관을 세운 그는 평생을 공간의 미학을 탐구하며 살아왔다. 그는 왜 깊은 철학적 울림을 주는 '짧은 비망록'을 썼을까?
노준의 토탈미술관장으로 부터 그 실마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 건축가는 2025년, '전립선암 4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평소 병의원과 담을 쌓고 살았던 문신규 선생님은 건강검진을 받거나 아파서 병원을 간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러나 지난해 몇개월사이 몸무게가 16kg나 빠지자, 마지 못해 노 관장의 손에 이끌려 대학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다. 그 결과 전립선암이 상당히 진행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병원에서 항암·방사선 치료와 수술을 권했지만 모두 거부하고 약만 한움큼 처방받아 귀가했다. 문 건축가는 처방받은 약도 거의 먹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오전에 집과 가까운 미술관 사무실에 나와서 간단한 빵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특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의 어린시절 사진을 오려서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는 '종이 건축 놀이'를 즐겨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암 진단을 받으면 절망과 투병의 서사를 써 내려갈 때, 그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셈이다. 약을 거부하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라는 현대 의학의 전형적인 경로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최근 검사 결과 그의 암 크기가 오히려 10%나 감소했다. 담당 주치의 교수는 "약효가 좋은 것 같다"며 똑같은 약을 다시 처방했다. 의학적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 현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치유'와 '인생의 마무리'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정신건강의학적 측면에서 문신규 건축가의 태도는 '급진적 수용(Radical Acceptance)'의 전형을 보여준다. 죽음을 피해야 할 공포나 싸워 이겨야 할 적군으로 보지 않고,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암 진단은 환자에게서 '내 몸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아간다. 하지만 그는 치료를 거부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남은 시간을 스스로 설계하겠다는 강력한 주체성을 발휘했다. 이러한 심리적 통제감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면역 체계를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의료전문기자로서 암 환자는 고령이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기사를 써왔던 필자에게 문신규 건축가의 결단이 당혹스럽지만 존중한다. 실제로 문 건축가는 일반 암4기 환자와 달리 건강해보였고 몸 상태도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비망록에 적힌 '죽음 앞에 서야 비로소 삶이 얼마나 찬란한 선물…'이라는 표현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의 극치다.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삶의 채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암 환자가 항암치료 없이 암 크기가 줄어드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의학계는 이런 경우와 관련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도, 인체의 자생력에 주목한다.
고령의 환자에게 독한 항암제나 방사선은 암세포 뿐만 아니라 정상 세포와 면역 체계를 붕괴시킨다. 문 건축가는 치료를 포기함으로써 신체가 겪을 극심한 물리적 스트레스를 차단했다. 평생을 예술과 건축이라는 고도의 정신 활동에 매진해온 그가 평온한 마음 상태를 유지함에 따라, 신체 내 면역 세포들이 암세포와 싸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 의료계 인사는 귀뜸했다.
현대 의학은 '생존 기간 연장'에 초점을 맞추지만, 문 건축가는 '삶의 질'을 선택했다. 무리한 처치 대신 좋아하는 공간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웰다잉(Well-dying)'적 접근이 오히려 '웰리빙(Well-living)'으로 이어진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문신규 건축가의 비망록은 무한 경쟁과 끝없는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늘 '더 가져야 할 것'에 매몰되어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찬란한 선물'을 망각한다. 죽음이라는 한계선을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한다는 그의 통찰은 행복의 기준을 재정립하게 한다.
사회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 맞춘 삶이 아닌, 죽음의 방식조차 스스로 결정하는 그의 모습은 '나다운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성공한 건축가로서 일군 업적보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술 작품처럼 조각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커다란 울림을 준다.
평창동의 바위산 위에 토탈미술관이라는 아름다운 공간을 빚어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노년과 질병조차 하나의 '경관'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비망록 속의 '큰 아쉬움'이라는 표현은 후회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느끼는 삶에 대한 지극한 애착의 다른 이름이다.
문신규 건축가는 고령의 암 환자이지만 지금도 평창동 미술관 한편에서 삶이라는 가장 어려운 설계도를 그려나가고 있다. 암 크기 10% 감소라는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얻은 '마음의 평화'다.
그의 비망록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제대로 열어보았는가? 죽음 앞에 서기 전까지 그 찬란함을 유예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망록의 짧은 글귀는 더 이상 한 건축가의 개인적 소회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읽어야 할 '삶의 헌장'이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그리고 오늘을 살라(Carpe Diem). 88세의 건축가는 온몸으로 이 오래된 진리를 다시 쓰고 있다.
기자가 문밖을 나설 때, 문 선생님은 5월의 눈부신 햇살 아래서 이른바 '햇살 샤워(Sunshine Shower)'를 하고 계셨다. 자신을 잠식하려던 병마 대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선택한 노(老) 건축가는 떠나는 이에게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손짓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품격'과 '삶의 찬란함'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이정표였다. 그가 설계한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햇살 속에 서 있던 그의 마지막 뒷모습이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추신: 토탈미술관은 1976년 개관한 한국 최초의 사설 미술관로 올해 개관 50주년을 맞는다. 문신규 건축가와 그의 부인 노준의 관장이 설계 및 운영의 기틀을 닦았던 토탈미술관은 한국 현대미술의 산실로 평가받는다.
이병문 의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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