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내세우며 이사회 독립성 강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보다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57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 모습. (사진=연합뉴스)
[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잇따라 이사회 의장직을 사외이사에게 맡기며 지배구조 개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개정 상법 시행 이후 이사회의 책임과 역할이 확대되면서, 기업들이 '이사회 독립성 강화'라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다만 재계와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형식적 변화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사회 의장 분리만으로는 경영진 견제라는 본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고, 오히려 책임경영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 LG까지 가세···'사외이사 의장' 사실상 표준으로 =
㈜LG는 지난 26일 이사회를 열고 박종수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했다. 이에 따라 기존 의장이었던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대표이사로서 경영에 집중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이번 결정으로 4대 그룹 지주사 가운데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지 않는 곳은 현대자동차가 사실상 유일해졌다. 현대차는 정의선 회장이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는 이미 사외이사 의장 체제를 정착시켰다. 삼성전자는 2020년부터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으며, SK㈜ 역시 지난해 사외이사를 의장으로 선임했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는 가장 강도 높은 지배구조 모델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재용 회장이 2019년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난 이후 현재까지 등기이사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오너가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이사회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은 2023년 재계 최초로 '선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는 등 이사회 중심 경영 체제 구축에 공을 들여왔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사진)은 최근 이사회 의장직을 내려놓고 경영활동에 전념하기로 했다. (사진=LG)
◇ 독립성 vs 책임경영···엇갈리는 평가 =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우선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함으로써 경영진에 대한 견제 기능이 강화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책임이 확대된 상황에서, 이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의사결정에 관여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점이 배경으로 꼽힌다.
반면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핵심 쟁점은 '책임경영'이다.
일각에서는 오너가 이사회에서 빠지는 것이 오히려 책임 회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법적 책임에서는 한 발 물러서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삼성의 사례를 대표적으로 언급하며 "이재용 회장은 등기이사 여부와 관계없이 경영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이사회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책임은 피하고 권한만 유지하려는 구조로 볼 여지가 있다"고 비판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4대 그룹 오너 중 유일하게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6일 서울 서초 본사에서 열린 제58기 정기주주총회에서 발언하는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 모습. (사진=현대자동차)
◇ '전문성 부족' 지적···"이사회 기능 재정의 필요" =
이사회 구조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도 나온다. 현재 국내 대기업 사외이사 구성은 재무·법률 전문가 중심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다. 이들은 기업의 회계 투명성이나 법적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는 강점을 가지지만, 산업 이해도나 경영 전략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이사회가 경영진을 실질적으로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법적 리스크를 방어하는 '컴플라이언스 조직' 기능만 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상법 개정 이후 이사 책임이 강화되면서 소송 리스크가 커진 점 역시 이러한 흐름을 부추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더욱이 대기업들이 이미 준법감시위원회 등 별도의 내부 통제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이사회와의 역할 중복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이와 관련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지난해 삼성전자 주총 이후 논평을 내고 "이사회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논평에서 TSMC 창업자인 모리츠 창 전 회장의 말을 인용해 "이사회가 경영진을 임명하므로 이사회는 기업거버넌스의 주축이다. 이사회는 3가지 역할이 있는데 감독·지도임명"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대만 TSMC의 경우 10명의 이사회 이사 중 7명이 사외이사로 구성됐으며, 이들 대부분이 반도체 산업 전문가들로 채워져 있다.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견제 구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 "형식 넘어 실질로"···지배구조 개편 2단계 진입 =
국내 기업들의 사외이사 의장 체제 전환은 분명한 흐름이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상장사 10곳 중 8곳이 여전히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지만, 올해 주총을 기점으로 이 비율은 점차 낮아질 전망이다.
다만 단순히 의장직을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글로벌 수준의 거버넌스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형식적인 이사회 독립에서 이제는 전문성과 책임감을 갖춘 이사회로 전환돼야 한다는 게 거버넌스 단체들의 주문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금은 지배구조 개편의 1단계가 진행 중인 상황"이라며 "앞으로는 이사회가 실제로 경영진을 견제하고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구조로 진화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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