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출연자가 눈물을 흘리는 순간보다 그 눈물에 이른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인다. 최근 예능가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한 회의 기승전결로 만드는 ‘인생서사형 콘텐츠’가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과거 토크쇼가 유명인의 근황과 신작 홍보, 개인기를 빠르게 훑었다면 최근 프로그램은 한 인물에게 머무는 시간을 늘렸다. 유년 시절과 무명 생활, 실패와 재기, 가족과의 관계까지 차례로 복원한다. 경연과 공연도 결과보다 참가자가 그 자리에 서게 된 이유에 집중한다.
TV조선 ‘천만기인쇼’가 대표적이다. 각 분야의 기인과 스타가 팀을 이뤄 합동 공연을 펼치지만 무대만큼 중요한 것은 준비 과정이다. 출연자가 새로운 기예를 배우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시간을 따라가면서 짧은 공연에 한 편의 성장 서사를 입힌다.
손빈아는 댄스스포츠 라틴 5종목 국가대표들과 무대를 준비하며 10㎏을 감량했다. 허찬미는 연습 도중 부상을 입고 목발을 짚는 상황에서도 고소공포증을 이겨내며 에어리얼 실크에 도전했다. 노래와 기예의 결합이 외형적인 볼거리를 만든다면, 실패와 두려움을 통과하는 과정은 시청자가 무대를 응원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천만기인쇼’는 이름 없는 능력자들의 삶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10m 높이에서 작업하는 고공 예술가, 펌프 세계 챔피언, 밸런싱 아티스트 등 출연자의 기술은 단순한 진기명기로 소비되지 않는다. 오랜 훈련과 생업, 가족의 응원까지 더해지면서 한 사람의 직업과 시간이 콘텐츠가 된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도 인물 중심 예능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길거리에서 만난 시민과 대화하던 초기 형식에서 출발해 지금은 배우와 운동선수, 기업인, 작가, 연구자 등 다양한 인물의 삶을 기록하는 프로그램으로 확장됐다.
올해 출연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경우도 기업의 성과만 다루지 않았다. 접시를 닦던 소년이 세계적인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 겪은 선택과 실패를 따라가며 한 인물의 성장담을 완성했다. 인공지능에 관한 전망은 그의 삶을 통과한 뒤에야 등장했다. 정보보다 사람을 먼저 제시한 셈이다.
한 사람의 서사를 프로그램 전체로 확장하는 방식도 등장했다. KBS는 올해 추석 연휴 데뷔 40주년을 맞은 이승철을 주인공으로 한 ‘당신의 삶은 네버엔딩 스토리-이승철’을 3부작으로 편성했다. ‘소녀시대’ ‘방황’ ‘인연’ ‘소리쳐’ ‘네버 엔딩 스토리’ 등 히트곡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각의 음악이 탄생한 시기와 가수의 인생을 연결했다.
한 명의 가수가 장시간 방송을 책임지는 구성은 자칫 팬 서비스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이승철 개인의 40년을 한국 대중음악의 변화와 겹치면서 세대가 공유하는 기억으로 넓혔다. 해당 방송은 축구 국가대표 경기 편성에도 2·3부가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책과 토크도 인생을 꺼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쿠팡플레이 ‘강호동네서점’은 매회 작가를 초대해 작품과 삶을 함께 들여다본다. 박상영 작가 편에서는 책의 내용만 소개하지 않고 씨름 선수를 권유받았던 어린 시절과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예능적인 대화로 풀었다. 서점은 책을 홍보하는 공간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을 열어보는 무대가 됐다.
MBN ‘김주하의 데이앤나잇’ 역시 출연자의 최근 활동보다 생애를 따라가는 데 무게를 둔다. 신현준 편에서는 신작 영화 소개와 함께 배우가 걸어온 코미디 연기 인생과 대표 캐릭터의 탄생 과정을 한 회에 담았다. 출연자의 작품은 홍보 대상이 아니라 삶을 설명하는 연대기로 기능한다.
가장 큰 요인은 제작 환경의 변화다. 대규모 출연진과 복잡한 게임이 없어도 인물 발굴과 자료 조사, 인터뷰만으로 밀도 있는 회차를 만들 수 있다. 한 회에서 나온 고백과 눈물, 도전과 성공의 순간은 짧은 영상으로 다시 나뉘어 온라인에서 소비된다. 긴 방송과 짧은 콘텐츠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구조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인물 중심의 예능은 빠른 예능이 제공하기 어려운 감정의 축적을 건넨다. 출연자의 결과를 먼저 보여준 뒤 과거로 돌아가는 대신 실패부터 현재까지 차곡차곡 따라가면 마지막 장면의 무게도 달라진다. 평범한 노래 한 곡과 짧은 성공담도 앞선 시간을 알고 나면 전혀 다른 장면으로 읽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면 모든 삶을 눈물과 역경의 공식으로 재단할 위험도 있다. 무대마다 가족사를 붙이고 작은 실패까지 극적으로 포장하면 인물의 삶은 프로그램이 원하는 감동을 생산하는 재료로 전락한다. 출연자의 상처를 지나치게 노출하거나 이미 알려진 이야기를 반복할 경우 시청자의 피로도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인생서사 예능의 경쟁력은 가장 불행하거나 극적인 사람을 찾는 데 있지 않다. 한 사람의 평범한 시간을 얼마나 낯설고 정직하게 바라보느냐에 달렸다. 자극적인 설정이 넘쳐나는 예능가에서 사람 한 명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일이 다시 새로운 포맷이 되고 있다. khd998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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