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재에서 중공업으로, 다시 반도체로 전환
SK실트론 품는 두산... 전력·소재·자동화 공급망 확대
AI 시대 핵심 인프라 공급망 구축 나서
두산그룹이 AI 시대를 겨냥해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1998년 가을, 두산그룹 임원진이 서울 중구 을지로 본사 회의실에 모였다. 그들이 내려야 할 결정은 창업 이후 100여 년간 그룹의 얼굴이었던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OB맥주. 1952년 창립 이후 한국 맥주 시장을 제패하며 두산의 현금창출원이자 자부심이었던 브랜드다. 전국 포장마차와 호프집에서 OB맥주로 건배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월드컵과 프로야구 시즌이면 OB는 광고판을 접수했다. 외환위기가 휩쓸고 간 한국 경제는 폐허에 가까웠고,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글로벌 자본이 필요했다. 결국 두산은 1998년 OB맥주를 벨기에 인터브루(현 AB인베브)에 5억 달러에 매각했다. 코카콜라 음료 사업도 그 무렵 정리됐다. 한 세기 가까이 쌓아온 소비재 왕국을 스스로 해체한 것이다.
OB맥주를 정리하고 중공업으로 방향을 틀었던 두산그룹이 이번에는 반도체를 새 성장 산업으로 택했다. 두산그룹은 글로벌 3위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인 SK실트론 인수를 추진하며, 사업 무게중심을 AI 인프라 공급망 분야로 옮기고 있다. 이는 시장 환경 변화에 맞춰 주력 사업을 과감히 교체해 온 두산 특유의 사업 재편 전략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업계에 따르면 두산은 SK그룹이 보유한 SK실트론 경영권 지분 51%와 총수익스와프(TRS) 계약 지분 19.6% 등 총 70.6%에 대한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할 예정이다. 여기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개인 보유 중인 나머지 지분 29.4%를 연내 추가 매입해 최종적으로 지분 100% 확보에 나설 방침이다.
소비재 매각과 중공업으로의 1차 전환
두산그룹은 1990년대 OB맥주와 코카콜라 음료 사업 등 내수 중심 소비재 업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외환위기와 글로벌 제조업 재편 국면 속에서 당시 경영진은 소비재 중심 사업 구조만으로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창립 100주년을 전후해 기존 핵심 사업이던 소비재 부문을 정리하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확보한 자금은 중공업으로의 첫 번째 산업 전환에 투입됐다. 두산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을 인수했고, 2005년에는 대우종합기계(구 두산인프라코어)를 확보했다. 소비재 기업이던 두산은 발전설비·건설기계를 기반으로 한 중공업 그룹으로 체질을 바꾸며 새로운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이러한 변화는 2000년대 중국발 인프라 투자 확대와 중동 플랜트 붐과 맞물리며 그룹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 속 생존 위한 핵심 자산 매각
그러나 2010년대 후반 글로벌 경기 둔화와 탈석탄·친환경 에너지 전환 흐름 속에서 중공업 중심 성장 모델은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발전 시장 침체와 계열사 지원 부담이 겹치면서 그룹 재무 상황은 빠르게 악화됐고, 두산중공업은 2019년 개별 재무제표 기준 4952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는 등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두산은 국책은행 채권단 관리 체제에 들어가며 대규모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두산솔루스 등 우량 계열사를 정리했고, 그룹 성장의 상징이었던 두산인프라코어까지 2021년 HD현대에 매각했다. 강도 높은 자산 재편과 재무 구조 개선을 통해 차입금을 상환한 두산은 2022년 채권단 관리를 조기 졸업하며 새로운 성장 산업 진입을 위한 기반을 다시 마련했다.
한 IB 업계 관계자는 “채권단 관리 체제에 들어갔던 기업에 국책은행이 대규모 인수금융을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시장 신뢰 회복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반도체·SMR·로봇... AI 시대, 인프라 중심의 세 번째 엔진
두산테스나 서안성 사업장 클린룸. /두산그룹
소비재와 중공업에 이어 두산이 선택한 세 번째 성장 엔진은 반도체 사업의 양적 확대에 그치지 않는다. 지향점은 AI 시대 핵심 산업으로 떠오른 전력·반도체·로봇을 하나의 공급망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
두산의 기존 사업 포트폴리오는 이미 이러한 구조를 일부 갖추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SMR과 가스터빈을 기반으로 AI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전력 수요 대응 역량을 확보하고 있으며, 전자BG는 반도체 기판 소재를 생산하고 있다. 2022년 인수한 두산테스나는 시스템 반도체 후공정 테스트를 담당한다.
여기에 SK실트론이 더해지면 두산은 반도체 제조의 출발점인 웨이퍼부터 소재·후공정까지 공급망을 확보하게 된다. 두산로보틱스 역시 협동로봇 기술을 기반으로 제조 공정 자동화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업 전환에 대해 빅테크 기업의 인프라 수요를 선점하려는 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 업계 전문가는 "데이터센터 가동에 필수적인 반도체 소재와 전력, 로봇 등을 하나의 사업 구조 안에서 연결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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