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연합뉴스 일러스트]
국내 전체 가구 중 60% 가까이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단순 주거 공간을 넘어 국민 삶의 질을 규정하는 핵심 인프라다. 매달 서민들의 가계부에 적지 않은 부담을 지우는 아파트 관리비는 그래서 ‘제2의 세금’으로 불린다. 눈먼 돈처럼 새어나가는 관리비 비리를 뿌리 뽑겠다며 정부가 도입한 것이 바로 ‘공동주택 관리 비리 조기경보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이 정작 현장에서는 알람만 요란하게 울릴 뿐, 사후 처분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났다. 국민을 속인 심각한 행정 방치이자 직무 유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허영 의원이 국토교통부와 한국부동산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공동주택 관리 비리 조기경보시스템’에서 비리 의심 경보가 1건 이상 발생한 공동주택은 전국 7851개 단지로 집계됐다. 관리비 공개 의무 단지 2만1729곳 중 36.1%다. 아파트 세 곳 중 한 곳꼴로 입찰 담합이나 회계 부조리 같은 이상징후가 포착됐다는 뜻이다.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한다면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와 시스템 운영기관인한국 부동산원은 즉각 지자체와 공조해 대대적인 실태 조사와 처벌에 나섰어야 마땅했다. 조기경보시스템은 2022년 국토부가 구축해 부동산원에 운영을 맡긴 시스템으로, 공동주택 관리정보시스템(K-apt)에 등록된 관리비와 장기수선충당금, 회계감사, 공사·용역업체 선정 내역 등을 분석해 비리 의심 단지를 선별한다. 운영 기관인 부동산원은 경보 결과를 지방자치단체가 열람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5개 이상 항목에서 경보가 발생한 단지는 국토부에도 별도로 통보한다.
그러나 실상은 참담하다. 부동산원은 지자체가 실제 점검을 나갔는지, 과태료를 부과했는지 등의 후속 조치 데이터를 단 한 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국토부 역시 전국 17개 시도 중 단 6곳의 부실 자료만 임의로 제출받았을 뿐, 나머지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지자체에 지도·감독 공문을 보냈으니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의 관료적 면피주의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현장 점검 결과가 피드백되지 않는 경보시스템은 있으나 마나 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더 기가 차는 것은 국토부와 부동산원의 ‘꼼수 행정’이다. 이들은 지난해말 조기경보 지표를 기존 31개에서 20개로 슬그머니 축소했다. 수의계약 결과 미공개 단지 같은 핵심 지표를 감시망에서 제외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다중 경보 단지가 8000여 곳에서 단 7곳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통계 왜곡을 통해 비리 아파트가 무더기로 줄어든 것 같은 ‘착시 효과’를 노린 것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경보 건수만 줄여놓고 관리비 비리가 개선됐다고 자화찬하려 했다면 국민을 바보로 아는 행태다.
정부의 감시망이 작동하지 않는 사이, 관리비 비리의 고통은 입주민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국토부는 지자체에 공문이나 날리는 무사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자체의 실태 점검과 적발 처분 결과를 조기경보시스템에 실시간으로 연동하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전면 재정비하는 한편 그 시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 아울러 꼼수로 축소한 경보 기준도 당장 원상복구 해야 마땅하다. 세금 성격의 관리비를 떼먹는 비리 세력을 비호하는 듯한 지금의 ‘나 몰라라’식 방관은 직무 유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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