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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브렉시트의 저주? 스타머 사임… 혼돈의 영국, 10년 새 총리 7명

키어 스타머 총리가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하면서 영국이 10년 새 7번째 총리를 맞이해야 하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하원 650석 중 412석을 휩쓸면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사임이다.

브렉시트의 저주? 스타머 사임… 혼돈의 영국, 10년 새 총리 7명

‘717일 만의 불명예’…역대 최단기 노동당 총리로 낙마

무너진 전통 양당제…우익 영국개혁당 지지율 1위 돌풍

갈팡질팡 정책에 민심 이반…차기 주자는 ‘앤디 버넘’ 유력

EU 정상회담 안개 속으로…‘브렉시트 후폭풍’에 영국 흔들

사임 발표하는 스타머 총리. EPA=연합뉴스.

키어 스타머 총리가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하면서 영국이 10년 새 7번째 총리를 맞이해야 하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하원 650석 중 412석을 휩쓸면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사임이다. 스타머 총리는 22일(현지시간)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사임을 발표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2년 전 같은 장소에서 “국가를 쇄신해 완전한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번 사임 발표는 영국민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브렉시트 국민투표 10주년을 단 하루 앞두고 나와 상징성을 더했다. 지난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잔류 진영을 이끌었던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이튿날 사임했다. 이후 영국은 험난한 브렉시트 협상,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에 따른 경제 부진과 물가 급등, 이민 급증, 국제 안보 불안을 겪으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낵 등 4명의 보수당 총리를 거쳤다.

이후 보수당 정권 심판론을 등에 업고 2024년 7월 출범한 스타머 총리의 노동당 정부 역시 극심한 정치·사회적 분열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날로 취임 717일째를 맞이한 스타머 총리는 이번 사임으로 고든 브라운(1050일)의 기록을 깨고 역대 최단기 노동당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역대 영국 총리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1990년대에 3028일에 달했으나, 2020년대 들어서는 500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분석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EU 탈퇴의 선봉에 섰던 나이절 패라지 대표의 우익 영국개혁당은 이미 지난해 초 노동당을 지지율에서 앞지르기 시작했다. 현재 정당별 지지율은 영국개혁당 27%, 노동당 20%, 중도우파 제1야당 보수당 19%, 좌파 녹색당 13%, 중도 자유민주당 13%를 기록 중이다. 보수당과 노동당이 각각 30~40%의 지지율을 확보하던 전통적인 양당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는 지난 2년간 치러진 두 차례의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연이어 입증됐다.

노동당 내부에서는 지지율 급락의 가장 큰 원인으로 스타머 총리 개인의 이례적으로 낮은 인기와 국정 및 당 의제 설정 능력 부족을 꼽았다. 스타머 총리는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글로벌 대기업과 맞선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잉글랜드·웨일스 검찰 수장인 왕립검찰청(CPS) 청장을 지내며 왕실 기사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다. 2020년 노동당 당권을 잡은 이후에는 중도주의와 실용주의 원칙을 내세워 정당을 좀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2024년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취임 이후 스타머 총리는 집권 2기를 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예상 밖의 브로맨스를 자랑하며 미국과 조기 무역 합의를 이루고 유럽 주도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재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또한 총선 공약대로 이민을 대폭 줄였으며, 브렉시트를 되돌리지는 않으면서도 EU와의 협력 강화를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명확한 국정 의제를 제시하지 못하고 강한 추진력 없이 갈팡질팡한다는 혹평이 끊이지 않았다. 경제 활성화와 공공 재정 안정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각종 복지 삭감 정책을 발표했다가, 중도좌파의 색채를 지우고 진보 유권자를 녹색당 등에 빼앗겼다는 당내 거센 반발에 부딪치면서 정책을 대부분 철회했다. 근로자 증세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기업과 부유층 증세를 추진했다가 보수 진영과 경제계의 반발을 샀다. 이 와중에 경제는 좀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차입 비용이 치솟으면서 공공 재정을 강화하지 못해 국방비 증액 계획마저 지연됐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억만장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과 친분이 깊은 피터 맨덜슨을 주미 대사에 임명했다가 해임하는 과정에서 당내 좌파 진영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2029년 여름으로 예정된 차기 총선에서 실각이 뻔하다는 위기감이 확산되면서 노동당 의원들은 스타머 총리를 압박해 결국 사의 표명을 받아냈다. 노동당은 유력한 차기 후보인 앤디 버넘 의원의 리더십 아래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분위기다. 스타머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며 내각을 이탈했던 웨스 스트리팅 전 보건장관은 이날 버넘 의원을 지지하며 “버넘이 영국 경제의 동반 성장, 공공서비스 개선, 당내 소통 확대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고 국수주의 세력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총리 교체로 노동당 정부가 과연 산적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경제 여건이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개혁당은 당장 총선을 치르면 최다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고 조기 총선을 주장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버넘은 나라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외에 외교, 경제, 국방 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스타머와 마찬가지로 버넘은 추가 차입에 반대하는 채권 시장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성 난 유권자들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진보 성향 싱크탱크 공공정책연구소(IPPR)의 해리 퀼터피너 소장 역시 파이낸셜타임스에 “여러모로 중도주의, 진보, 주류 정치의 마지막 기회”라며 “노동당은 변화를 약속해 집권했다. 유권자들은 이를 언제까지나 믿지 않고 완전히 다른 것을 찾게 마련”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스타머 총리의 전격 사임으로 내달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릴 예정이던 EU와 영국 간 정상회담 개최 여부도 불확실해졌다. 파울라 피뉴 EU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정상회의를 원래대로 여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영국과 함께 재검토하고 있으며, 향후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양측은 내달 22일 정상회담을 통해 식품·동물 안전기준 협력, 청년 교류, 탄소배출권거래제(ETS) 연계 방안 등 관계 개선을 위한 합의안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스타머 총리의 뒤를 이을 차기 영국 총리로는 앤디 버넘 하원 의원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당내 경쟁자가 없을 경우 그는 내달 22일 정상회담 예정일 이전에 총리 취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스타머 총리는 7월 9~16일 당 전국집행위원회(NEC)를 통해 대표 후보를 지명하고, 9월 1일 의회 개회 이전에 차기 대표를 확정하는 일정을 제시한 상태다.

버넘 의원은 EU에 우호적인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최근 제기되는 영국의 EU 재가입 요구에 대해서는 “지난 10년간 영국을 분열로 몰고 간 격렬한 논쟁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한편 유럽외교협회(ECFR)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 응답자의 57%는 영국의 EU 탈퇴가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답했으며, 4분의 3은 영국이 EU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권순욱 기자(kwonsw8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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