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전 ‘찬란한 봄 역설의 풍경’, 서울 토포하우스에서 14일부터 5월 11일까지
미술은 세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2026년 3월 시작한 미국•이스라엘-이란 중동전을 보는 고영미(Ko Young-mee•46) 작가는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20여년전 동생이 군 복무중 한쪽 눈을 실명했으나 작가는 폐쇄적인 군에 책임이나 보상을 요구할 수 없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합법적 목적으로 군대를 독점하고 있지 않은가. 고영미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조하며 그림으로 시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강렬한 주제 의식을 투사한 작품은 시간을 관통하며 작가 자신도 변화시킨다. 동생은 국가유공자로 처우받게 되었으나 이후 북한의 핵 위협, 전쟁으로 치닫는 국제정치 문제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진다.
한여름 밤의 꿈2, 한지 위에 채색 112×145.5cm 2008
“예술과 (국제)사회는 각각 독립된 영역이 아닌 상호 연관된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예술을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사회적 논의와 구조를 반영하는 매개체로 인식하기에 그렇다.”(작가 노트)
미•중 패권 경쟁이 점점 심화될수록 중•일간 분쟁 지역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걸 보았다. 우크라이나의 나토(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가입 시도에 따라 러시아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4년간 양측 희생자 120만~180만명(사망자 25만~60만명)을 낳았다.
“(미국이 주도하는)나토의 존재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들 국가가 나토를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군수산업은 나토의 존속과 확대를 지속적으로 지지해 왔다.”(라후아리 아디.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한국어판 2026년 4월호)
러-우 전쟁은 1차 세계대전식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러시아는 점령지 유지, 새로운 영토 점령을 목적으로 ‘갈아넣는 전술(meat grinder)’을 구사, 전장의 민간인들 포함 많은 희생자를 낳고 있다.
전쟁은 미학적 의미를 가진 ‘풍경’이 될 수 없다. 국가와 국가, 민족대 민족 등 대규모 집단 대 집단이 무력으로 싸우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다.
중동의 가자 지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은 과거 박해의 희생자였던 유대인, 혹은 그 후손들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하는 가해자가 되는 역설을 낳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전쟁을 설계하고 지휘하는 시대이다. 이른바 ‘에픽 퓨리’ 작전에서 팔란티어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과 앤트로픽의 클로드가 모든 출처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통합해 표적을 식별하고 작전 계획을 추천하면, 승인과 동시에 다량의 목표물을 타격한다.
그날. 한지꼴라쥬 위에 채색, 72.5×103cm 2012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러시아이다. 치솟는 유가는 러시아 전쟁 금고를 다시 채워주며 장기전이 가능한 동력을 제공한다. 새로운 전쟁이 기존 전쟁의 양상마저 바꾸고 있다.
고영미는 자신의 가족사가 모티브가 되어 전쟁을 동화적 풍경으로 은유해온 작업 세계를 확장한 2025년 전시, ‘빨강의 기억’에서 러-우 전쟁과 핵 등 동시대 위기 상황을 예술가로서 느끼는 실존적 불안과 긴장으로 나타냈다. 전쟁 보도 사진에서 접한 여행용 캐리어를 끄는 피난민 모습과 거리에 나뒹구는 시신들, 죽은 여성의 몸에 새겨진 표식과 같은 인간성 상실을 온 몸으로 몸서리치게 느꼈다.
작가는 군인과 민간인이 다치고 죽는 전쟁, 또는 그 이면을 온 몸으로 느끼며, 전쟁에서 벗어난 일상의 안녕을 다룬 ‘피와 살’ 주제로 예술적 형상으로 재구성한다.
“빨강은 전쟁이 야기한 죽음의 이미지뿐 아니라 월경, 출산 같은 여성의 생리적 경험을 나타내는 색으로 감정과 기억을 층위화한다.”(작가 노트)
고영미의 빨강은 자신이 살던 도시와 마을이 살상이 자행되는 전장이 될 수도, 경제 및 생태 문제의 재난이 소리없이 다가올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마더. 장지에 한주 콜라쥬와 채색, 162×130cm 2024
스페인을 침략한 나폴레옹군이 저항하는 스페인 국민들을 세워놓고 학살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1808년 5월 3일'은 전쟁 학살 고발 작품이다. 총살 부대의 총구를 직면한 상황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 1973)가 그린 ‘게르니카’는 부러진 칼을 들고 쓰러진 전사, 그 위에서 울부짖는 말의 머리, 자식을 잃고 두 팔을 들어 하늘을 향해 통곡하는 어머니, 흑색•흰색•회색•갈색으로 뒤덮인 거대한 벽, 날카로운 불안감과 이질감을 주는 삼각형 구도는 암울함을 더한다. 프랑스 발로리스에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1951’은 폭력에 대한 분노와 약한 자들에 대한 연민의 표현이다. 황폐하고 시간을 알 수 없는 풍경, 강제로 발가벗겨진듯한 여성들과 아이들, 가해자들은 중세 시대의 기사, 로봇의 형상을 한 군인들 모습이다.
꽃, 장지에 채색 72×100cm 2024
백남준(1932~2006) 작품 ‘콰다카날 레퀴엠•1977’ 무대가 되는 서남태평양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섬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중심의 연합군과 일본군간 전투 지역이다. 백남준은 예술적 동지 샬롯 무어먼의 퍼포먼스, 참전자들의 인터뷰, 전쟁 다큐멘터리 장면들을 교차 편집하고 이미지들을 겹치거나 색상을 변조하는 방식으로 죽은 이들의 안식을 바라며 작품을 완성하였다.
안젤름 키퍼 (Anselm Kiefer, 1945~ )는 독일의 어두운 역사와 홀로코스트의 흔적을 다룬다. 작품은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검게 탄 들판, 짚단, 납, 깨진 유리 등을 사용하여 전쟁후의 폐허를 묘사한다.
서용선(75)은 노근리와 한국전쟁에 대해 20년 이상 지속적으로 작품으로 말하고 있다. 2004~2006년, 2011년 그린 ‘희생자’ 연작은 자신을 몰입적으로 투사한 작품이다. 그 자신 한국전쟁둥이 서용선이 노근리 사건을 처음 접하고 수년간 받은 충격은 폭발하는 분노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는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 또는 역사적이고 비극적인 전쟁에 대한 고정 관념과 선입견을 엎어버린다. 함부로 평화와 비전을 말하지 않는다. 부정의에 분노하며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가진다.
지금 시대 한국 작가들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우크라이나, 이란 등에서 숱한 전쟁의 참화를 접하면서도 인간이 행하는 폭력에 대한 분노,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영화에서 초반의 이미지•장면•대사 등이 이후 전개나 결말을 미리 암시하며 때로는 아예 첫 장면에서 강하게 작동하는 게 ‘오프닝 포어섀도닝(opening foreshadowing)’이다. 고영미 작품에서 종말의 서막(the begining of the end)을 알리는 미장센은 영화의 오프닝 포어섀도닝처럼 찬란한 풍경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하루에도 수백 번 언론에 오르내린 작금의 중동 전쟁 사진과 영상들이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본다. 공중에서 투하된 폭탄에 미니어처 장난감들처럼 부서져 내리는 건물들 풍경, 연기가 시커멓게 솟아오르는 정유시설 폭발과 쏟아져 내리는 분진들 속에 더 깊은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안다.
이란-미국•이스라엘 전쟁은 미사일 궤적, 요격 장면, 레이더 화면, 열감지 이미지 같은 비물질적 시각 정보로 소비된다. 풍경은 궤적과 신호의 집합이다. 지면과 공중의 풍경이 충돌한다.
맞닥뜨린 장면, 한지 위에 채색 90×100cm 2026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도 마찬가지이다. 뉴스 화면, 위성 이미지, 드론 영상, SNS에 떠도는 파편화된 크립의 정보이다. 고영미가 한반도에서 바라보는 유럽과 중동의 전쟁은 매개된 이미지들의 층이다.
“미디어에서 보는 간접 경험, 타인의 일이 나 자신에게 전가되어 불안한 심리를 갖는다. 몸으로 기억되고 축적되어 작업으로 표현된다. 그러기에 작업은 단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대변한다.”
찬란한 봄날1, 장지위에 채색 63×46cm 2015
미국 정치학자 새무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1927~2008)이 명저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1996년간>에서 서구, 이슬람, 동아시아 삼자 패권 구도가 새로운 문명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헌팅턴은 ‘문명’을 하나의 공간, 문화, 이를 통해 파생되는 특성과 현상이 결합된 집약체로 본다.
고영미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인간은 소멸하는 존재이나 문명과 인류가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내어놓는다. 비 내리고 바람부는 봄 밤 거리에서 맞닥뜨린 지는 벚꽃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웬지 슬프다. 작가는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고영미 개인전 <찬란한 봄, 역설의 풍경>은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4. 14일부터 5월 11일까지이다.
심정택
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5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그룹(자동차 사업 부문) 등에서 근무했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31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10년전 출간한 <이건희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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