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청주 성안길을 산책했다. 이번 산책은 고향 친구 2명과 함께했다. 우리는 전날에 숙소를 성안길 근처인 서문시장에 있는 곳으로 정했다. 예전 청주읍성의 서문이 있던 자리에 시장이 생겨 서문시장이라고 부른다. 대구의 서문시장도 이름의 유래가 같다.
우리는 미리 신청해둔 문화해설을 위해 '용두사지철당간' 앞에서 문화해설사를 기다렸다. 나는 95년도에 청주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이곳을 성안길보다는 본정통이라고 불렀다. 본정통이 일제강점기의 이름이라 하여 점차 성안길로 부르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제는 본정통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성안길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조선시대 청주성 안의 중심지였던 데서 비롯되었다. 처음 입학할 때 짐을 옮기러 왔을 때, 충북도청 뒤편 길에 있는 삼일공원에서 한 인사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시민단체의 시위를 봤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춘수의 동상이었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서명했으나, 이후 친일로 전향했다. 결국 뒤늦게나마 그의 동상은 철거되었다. 식민지 시절 일본이 붙인 이름이 사라지고, 친일 인사의 동상도 청주에서 사라졌다. 역시나 충절의 고장이라 불릴 만하다.
청주는 삼국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시절 전략의 요충지였다. 과거 상당, 서원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청주에는 이들 이름을 가진 기관들이 많다. 고려 초에 이르러 청주는 더욱 번성했는데, 시내 한복판의 철당간이 그 흔적이다. 사찰에서 행사를 치를 때 깃발을 내걸던 당간지주가 철로 만들어져 철당간이라 불리며, 아래로부터 세 번째 철통에는 한자가 표기되어 있다. 천 년도 더 된 쇳덩이에 새겨진 문자를 읽으니, 묵향보다 묵직한 시간의 감각을 느꼈다.
용두사철당간이라고 적힌 첫문구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해설을 들어보니, 고려 광종 시대에 철당간이 만들어진 배경이 표기되어있다고 한다. 특히 광종 시대에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 고유의 연호를 썼다고 한다.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읽을 수 있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청주의 한 중심에서 자리잡고 버티어 온 세월이 철당간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우리는 철당간에서 자리를 옮겨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압각수라고 불리는 큼지막한 은행나무가 우리를 반겼다. 최근에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 이색의 일화가 유명하다.
1390년 이색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 옥에 갇혔는데, 때마침 홍수가 나자 함께 갇혀 있던 이들과 압각수 위에 올라 목숨을 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이 하늘이 그들의 무죄를 증명한 것이라 여겨 모두 석방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왕조 교체를 준비하던 시기에 민심을 다독이고자 하는 이성계의 뜻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청주는 충청도의 중심지로 더욱 자리를 굳혔다. 충주와 청주의 이름을 합쳐 충청도라 불린 것처럼 말이다. 충청감영은 공주에 있었으나, 청주에는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병마절도영이 있었다. 청주 도심 안에 있는 중앙공원이 바로 병마절도영이 있는 터다. 한자로 '정곡루'이라고 걸린 현판이 걸린 영문이 지금도 그 흔적을 알리고 있다. 또한 중앙공원에는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을 기리는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다.
함께 걷던 친구 중 하나는 이곳 청주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2층 집을 지어 1층에는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2층에는 자기 가족이 산다. 한 달에 두어 번 처가 식구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고, 장인어른을 모시고 청주 인근 시장에 나가 밥을 대접하기도 한다.
그가 결혼할 때 처가가 은진 송씨라고 자주 자랑하던 기억이 났다. 은진 송씨를 대표하는 학자는 우암 송시열이다. 충청도 곳곳에 그를 기리는 사당과 서원이 남아 있고, 청주에도 그의 호를 딴 우암산이 있을 정도다. 충북대학교에는 우암연구소까지 있다.
친구의 자랑을 들으며, 청주가 얼마나 깊은 보수적 정서를 간직한 고장인지 새삼 느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청주성을 향해 진격했다가 끝내 패퇴한 사실도 그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청주에서 대학을 나온 후 이십여 년간 시민운동을 해온 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보수의 땅이라 불리던 청주에도 변화의 바람이 부는 듯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충북도청이 청주에 세워지고 교육 기관들이 들어섰다. 다만 경부철도선이 대전을 지나고, 금강의 물길이 물류 기능을 잃으면서 청주의 번영은 한동안 주춤했다. 해방 이후 청주는 교육 도시의 기반 위에 산업시설이 들어서며 새롭게 성장했다. 지금은 SK하이닉스 공장이 증설을 거듭하며 청주 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청주공항도 예전에는 군사공항이었으나, 이제는 국제공항으로 발돋움했다.
나의 20대를 보낸 청주는 그만큼이나 변해 있었다. 청주 도심을 가로지르는 무심천과 미호천의 물길처럼, 나의 청춘도 그렇게 흘러갔구나 싶었다. 마침 무심천변에 벚꽃이 막 피고 있었다. 96년 이맘때 대학교 동아리 소속 사람들과 벚꽃이 떨어지는 이 길을 함께 걸었다. 그때 그 잔상의 감정이 나에게는 평생의 힘이 되어 주었다. 새로운 물길이 생기고, 새롭게 꽃이 피는 것처럼, 새로운 청춘들이 성안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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