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연 씨가 에어컨 세척을 위해 조립∙분해하는 모습. 본인 제공
15년간 몸담았던 병원을 떠나 6년간 카페를 운영한 박정연 씨(46)가 이번에는 에어컨 세척 기술자로 새 출발에 나섰다. 남성 수강생들 사이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기술을 익힌 그는 “새로운 분야를 배우는 건 언제나 재미있다”며 웃었다.
● 병원 심사부장에서 카페 사장으로…“내 일을 하고 싶었다”
방송 제작을 전공한 박 씨는 전공과 무관한 병원에서 접수·수납 업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지인 추천으로 입사한 뒤 차근차근 심사과 과장, 부장까지 올랐다”며 “병원 심사 경력이 15년 정도 된다”고 말했다.
병원을 떠나게 된 계기는 육아였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간간이 병원 일을 도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박 씨는 “어느 순간 어딘가에 얽매여서 일하기 싫어졌다. 제 일을 너무 하고 싶어서 창업을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평소 커피를 좋아해 국내·국제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갖고 있던 그는 2020년 카페 창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곧 코로나19가 닥쳤고 적자가 이어졌다.
박 씨는 “창업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며 “좋아하는 일을 하니 재미는 있었지만 매출이 나오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쌓였다”고 털어놨다.
박정연 씨가 세척할 에어컨을 들여다보는 모습. 본인 제공
6년 운영한 카페 접고 다시 배웠다…이번엔 에어컨 세척
6년간 운영한 카페를 올해 4월 정리했다. 박 씨는 “수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뭘 하면 좋을지 다시 고민하게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폐업 과정에서 정부 지원을 받던 중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중장년취업사관학교를 알게 됐다.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여러 과정을 살펴보다 에어컨 분해세척 분야에 눈길이 갔다.
박 씨는 “처음에는 전기 관련 과정을 신청하려 했는데 교육 기간이 6개월 정도였다”며 “에어컨 세척 과정은 한 달 반가량으로 비교적 짧아서 도전해봤다”고 말했다.
에어컨 설치 일을 하는 지인도 영향을 줬다. 그는 “친구가 일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관련 일을 해보고 싶었다”며 “설치는 체력적으로 힘들 것 같아 세척을 선택했다”고 했다.
박정연 씨가 세척할 에어컨을 들여다보는 모습. 본인 제공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올해 중장년취업사관학교를 출범해 AI·디지털, 전기·설비, 돌봄·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의 직업훈련을 운영하고 있다. 에어컨 분해세척 기술창업 과정 1기에서는 수료생 21명 가운데 18명이 창업했다.
박 씨가 참여한 과정에서는 이론과 실습교육을 거친 뒤 멘토와 함께 고객의 집을 찾아가 실제 에어컨을 분해·조립하고 세척하는 현장훈련을 진행했다. 벽걸이형은 한 대를 세척하는 데 약 1시간, 스탠드형은 약 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박 씨는 “배우는 걸 워낙 좋아해서 재미있었다”며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해 체력도 있는 편이라 세척 작업이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교육을 마친 그는 올해 6월 ‘에어컨싹싹’이라는 업체를 냈다. ‘싹싹하게 잘 청소해 드리겠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교육기관에서 창업 절차와 필요한 요건 등을 안내받아 사업자 등록도 마쳤다.
20일 서울 서초구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서울시 중장년 일자리박람회 2026’에서 진행된 토크콘서트에서 박정연 씨(가운데)가 창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김남수 뚝딱홈케어아카데미학원 대표, 오른쪽은 오세훈 서울시장. 이혜원 기자 hyewon@donga.com
● 남성들 사이 유일한 여성…“여성 고객에겐 오히려 강점”
에어컨 분해세척 기술과정 1~3기 수강생 가운데 여성은 박 씨가 유일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이었지만 여성 기술자라는 점은 예상하지 못한 경쟁력이 됐다.
박 씨는 “남성 고객이 혼자 있는 집에 방문할 때는 저도 조심해야 한다”며 “반대로 혼자 사는 여성 고객들은 남성 기술자가 집에 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있다. 여성인 제가 가면 굉장히 반가워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책상에서 서류를 검토하다가 현장에서 공구를 잡는 일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그는 “사무직은 익숙하니 편하게 일할 수 있지만 현장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많아 늘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래도 만족감은 크다. 박 씨는 “한여름에는 더워서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직접 땀 흘려 일하니 오히려 보람이 크다”며 “익숙해지면 작업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수입도 병원 사무직으로 일하던 시절보다 늘었다. 그는 “창업하고 나서는 수입이 훨씬 많아졌다. 그게 정말 기쁘다”며 웃었다.
다만 에어컨 세척은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박 씨는 “7월 정도면 성수기가 끝나서 10월인 지금은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함께 교육받은 동기들은 세탁기 세척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고, 박 씨 역시 다른 기술을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교육 일도 고민 중이다.
20일 서울 서초구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서울시 중장년 일자리박람회 2026’에 마련된 직업체험존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박정연 씨에게 에어컨 세척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이혜원 기자 hyewon@donga.com
● “일단 시작하고 부딪혀라”…중장년층에 ‘배움’ 강조
박 씨는 병원에서 일할 때부터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피부미용, 요리 등 여러 분야를 배우고 자격증을 땄다.
그는 “뭔가를 배우는 것 자체에서 재미와 뿌듯함을 느끼는 게 제 장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길 망설이는 중장년에게는 ‘일단 시작해보라’고 권했다.
박 씨는 “일단 시작해서 부딪혀봤으면 좋겠다.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한번 해보면 길이 보이고 자신감도 생긴다”고 말했다.
아직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지 못한 사람에게는 “저처럼 이것저것 접해봐도 좋다”며 “여러 일을 경험하다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발견하면 그때 더 집중적으로 해보면 된다”고 조언했다.
20일 서울 서초구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서울시 중장년 일자리박람회 2026’ 개막식에서 박정연 씨(왼쪽에서 세 번째)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혜원 기자 hyewon@donga.com
100세 시대의 숙제가 달라지고 있다. ‘노후 자금이 얼마나 되느냐’가 아니라 ‘길어진 노후를 어떻게 사회와 속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있을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퇴직자들의 어려움은 단순히 소득이 끊기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몸담았던 조직에서 벗어나면서 사회적 역할과 소속감을 잃어버리는 데서 더 크게 다가온다. 동아닷컴은 연중기획 ‘다시 현역’ 코너를 통해 정부와 지자체, 기업, NGO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은퇴자 일자리를 확대해 의미 있는 노후를 만들어가는 사례를 집중 소개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