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스틸컷.
삶을 지키려는 열망이 장르의 컨벤션을 비틀면서 다가오는 데이비드 맥킨지 감독의 엄청난 범죄드라마 ‘로스트 인 더스트’는 드물게 잘 만든 21세기 서부극이다.
이 영화가 빼어난 이유는 장르의 컨벤션을 총동원하여 서사를 비틀어버렸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카우보이와 갱과 인디언과 황금이라는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상징물을 현대로 끌어와서는 법과 정의가 살아 넘치던 텍사스를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 쓰는 피로한 카우보이들’의 공간으로 치환시켰다는 것이다. 황량하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네 명의 인물들 관계가 적대적이라기보다는 파트너처럼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일 터.
구형세단에 몸을 실은 그들은 드넓은 평원을 달리지만, 그것은 땅따먹기 경주도 아니요, 현상수배범을 쫓는 기민한 몸놀림도 아니다. 그곳이 텍사스라면 21세기에 벌어져도 무방할 것 같은 이야기들, “21세기에 젖소나 몰고 있다”고 투덜거리는 카우보이나 “하루하루 은행 강도로 살아가는 시대는 아니”라던 카페의 노인들이나, 낭만이 깃든 서부시대를 그리워하긴 마찬가진 것도 그곳이 텍사스여서가 아닐까.
수정주의 서부극의 걸작 ‘와일드 번치’의 한 장면, 훔친 자루에서 은이 아닌 쇠뭉치가 나오자 실망한 파이크는 말한다. “우리도 앞으론 머리를 써야 할 것 같아”라고. 때는 서부시대가 막을 내리고 자동차와 비행기가 다니는데, 그들은 시대에 낙오된 나이 먹은 총잡이들이 아니던가. 반면 ‘로스트 인 더스트’는 은행 강도라는 서부극의 전형을 앞세워 ‘자본의 힘 앞에 무너진 정의와 의리와 선의’의 시대를 반추한다. 역모기지론 때문에 땅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 토비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행동도, 인디언 레인저가 선배의 조롱에 밀리지 않고 대꾸하는 것도, 웨이트리스가 끝내 토비를 지목하지 않는 것도, 백인과 금융자본에 휘둘려온 소수자의 애환이라는 공통의 아픔에서 비롯된다. (특별 보호관리 대상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익사업 명목으로 연방정부가 허가해준) 카지노에서 토착민인 코만치족이 백인에게 돈을 잃는 장면은 다분히 시사적이다.
앙드레 바쟁이 “그것은 특히 가장 영화적인 영화”라고 단언한 것도, 할리우드 장르 중 가장 먼저 선을 보인 것도 서부극이다. 수정주의 서부극도 시대를 마감하고 간간이 추억으로나 떠올릴 법한 장르로 전락한 지 오래. 데이비드 맥킨지는 이 진부한 장르를 현대로 소환하고는 잘 닦인 도로 위에 흙더미 중고차를 올리듯 동시대성 위에 안착시킨다. 심장박동을 견인하는 비트 강한 음악이 앞에서 끌면 서부극의 아이콘과 장르의 컨벤션이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 결과다. 그러므로 마커스가 토비를 뒤로하고 돌아서 나오는 시퀀스는, 이전까지 비틀어온 서부극의 전형을 제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시도이면서 텍사스라는 장소성을 재확인시켜주는 명장면이다. 범죄자와 추적자 관계를 떠나 사내들의 정서가 깃들어있고, 같은 편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결코 등을 보일 수 없는 시대적 정서까지 함의한다는 얘기. ‘로스트 인 더스트’가 더 없이 영화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드넓은 평원 위에 놓인 사내들의 자조 섞인 푸념이 허공에 흩어질 때, 광활한 텍사스를 종횡하던 그들의 쓸쓸하고 건조한 이야기는 빛바랜 사진처럼 남게 될 것이다. 서부극의 컨벤션을 뒤집으면서 서부극을 추억하게 만드는 ‘로스트 인 더스트’. 장르적 쾌감을 동반한 치밀하게 계산된 미장센은 짙고 낮은 텍사스의 하늘처럼 가슴에 내려앉고, 언제라도 흙먼지 털어내고 떠날 수 있는 허허로운 마음을 품은 사내들의 깊은 눈매가 아련하다.
백정우 영화평론가
댓글
0